[ 미국서의 사절단 활동 ]

경제사절단은 65년11월10일 미국으로 떠났다.

주요일정은 워싱턴에서 국무성 상무성 원조처(AID) IFC(국제금융공사) 등을,
뉴욕에서는 금융계 기업인 및 미국 수입상을 접촉하는 식으로 마련됐다.

중서부 시카고 등지에서는 디트로이트 공업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원순 단장이 아무리 미국생활에 익숙해도, 미국 관.민들과의 면담내용과
진행은 사무국장인 필자의 몫이었다.

20여명의 비행기 예약, 호텔 배정 등까지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한밤까지 눈코뜰새 없었다.

지금 같으면 비서 수행원 등 2~3명의 사무국 직원이 같이 가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제인협회는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튿날 미 국무성을 방문했다.

미 국무차관이 짤막하게 환영인사를 했다.

그리고 극동담당 차관보, 상무성 교역담당, AID 극동국장 등이 줄줄이
나타났다.

"줄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한사람이 자기 소관을 5분 정도 브리핑을
한 뒤 질문을 받고는 곧 자리를 뜨고, 다음 담당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리핑"이라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한국에서 처럼 자기 소관업무도 아닌 사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제사절단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 AID 본부장 예방에 대비해 선물을
준비했다.

한말의 불행했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엽의 매 그림 두폭이었다.

진학문 상근부회장이 본인과 함께 인사동에서 직접 고른 것이었다.

색이 바래서 헐값으로 구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림만 전달했다.

몇달 후 AID 본부장에 준 그림이 되돌아 왔다.

동봉한 편지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의 워싱턴 방문때 만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그림 고맙기는 하지만
값이 20달러 이상인 선물은 못 받는 공무원 규정에 따라 되돌려 보내니 양해
하길 바랍니다"

미국 공무원 사회의 기강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렇게 되돌아 온"오원 매그림"은 지금 전경련 손병두 상근부회장실에
걸려 있다.

그런데 딘 러스크 장관에 준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워싱턴 방문 세번째 날에는 상무성 주선으로 미 기업인들과 투자유치
설명회를 가졌다.

우리가 준비한 설명자료는 한국경제현황, 1차5개년계획 내용 등이
전부였다.

싸고 근면한 인력자원이 풍부하니 투자해 달라는 단순한 것이었다.

필자는 30분 가량 열을 내서 설명했지만 왠지 별 반응이 없었다.

회의장은 초초한 침묵만이 흐렀다.

이때의 난감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마침 한국에 정유합작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1년동안 한국에서 근무하고
최근에 돌아 온 걸프(Gulf) 석유회사의 부장이었다.

이 친구의 설명은 힘이 있었다.

"한국 근로자의 질은 세계 으뜸이다. 일본보다도 앞선다. 세계 어느나라
근로자도 근면성과 능률에 있어서 한국을 따라갈 수 없다. 한국에서의 우리
건설공사는 예정보다 보통 3~4개월 빨리 끝나게 된다. 이것이 나의 지난
10년간 세계 각국 공장 건설에서 얻은 경험을 비교한 결론이다"

나는 백만 원군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걸프 친구의 설명이 끝나자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국근로자의 작업시간 작업태도 세공법이나 기술 습득능력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설명회는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필자는 이때 현장 경험이 없는 숫자나 이론은 아무리 훌률한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화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또한 내자신 현장 체험이 없는 점을 부끄럽게 느꼈다.

(그후에도 탁상공론, 백면서생을 연상케하는 경험부족으로 실수하는 내 자신
을 번번이 발견한다)

워싱턴 마지막날 필자만 IFC 를 방문했다.

이미 수차례 서신교환이 있었기에 한국에 "개별금융회사"를 설립하는
문제는 의외로 순조롭게 풀렸다.

12월초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약속 받는다.

귀국하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