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미국의 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가 쓴 책이다.

일본문화에 대한 고전으로 꼽힌다.

이 책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미국정부가 일본인의 성격을 알고자 집필을
의뢰한 것이다.

전쟁중인 급박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이기기 위해 그 뿌리를 캔 셈이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재미 일본인들을 집중
조사해 이 명저를 남겼다.

19세기의 탐험가와 선교사.

이들은 미지의 나라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활동했다.

미개인(?)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거나 순교하기 일쑤였다.

이들의 순수한 정열 뒤엔 제국주의의 세계전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들은 식민지 후보지역에 미리 나가 그곳의 지리 정세 풍속 등을 조사하는
역할을 했다.

요즘 미국엔 "기업인류학"이라는 분야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기업인류학회 회원이 1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초국적 기업들이 문화배경이 다른 나라에서 겪는 사례들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폭탄주를 마시면 일이 잘 풀리는
사회심리적 요인을 탐구한다.

경제활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오묘한 경제현상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사람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학자들이 이런 문제에 적극
참여한다.

정부나 여러 재단에서 연구자금도 풍성하게 대준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재벌개혁, 빅딜, 선단식 경영 등 경제현안과 관련된 키워드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의 접근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몇몇 경제.경영학자들의 주장이 논의를 독차지하다시피 한다.

이 가운데 영향력이 큰 학자의 논리는 추종자들의 전범이 된다.

그러니 논의 수준이 심화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다.

여기에다 어설픈 아마추어 평론가들의 정제되지 않은 관견까지 난무하다
보니 초점이 더욱 흐려지고 있다.

"선단식 경영"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한국인의 다남아 선호의식과 깊은 연관을 가진 개념이다.

아들을 많이 낳아야 조상에게 떳떳하다는 것 아닌가.

계열사 하나 하나는 아들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가급적 계열사를 많이 늘리려 하는 것이다.

형제끼리 서로 돕는 것은 유교윤리의 필수 덕목이다.

계열사끼리 상호 지급보증을 하며 덩치를 키우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계열사를 떼내어 다른 그룹에 넘기는 "빅딜"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화
심리학 측면에서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내 아들을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순혈주의에 대해 집착하는 한국인은 한반도에서 태어난 미혼모 아이들을
자신들의 품에 품지 못하지 않는가.

기업의 지배구조에 관한 쟁점을 훑어보자.

사외이사를 늘려 경영진에 대한 감시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경영진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본다.

기업소유주와 끈이 닿는 사람들로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오너와 얽힌 사외이사들이 견제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 기업과 전혀 무관한 객관적인 제3자가 뽑힌다 치자.

이들은 무슨 애정으로 남의 기업 일에 매달리려 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하는 것을 용기로 여기는 서구식
사회시스템에 어울리는 제도이다.

IMF 관리체제 이후 기업과 정부에서 연공서열을 파괴하고 능력주의를
도입하는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집단주의, 가부장제, 권위주의 등의
요인 때문에 구미식 실적주의가 단기간에 뿌리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데 다른 나라 제도가 어떻게 쉽사리 정착할 것인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자학적 비난을 가해서는
안된다.

문화배경이 다른 곳에서 온 제도가 하루아침에 우리 몸에 맞을 리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수렴현상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만큼 우리 것, 남의 것을 구분하는
일이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에 맞는 새 밀레니엄 경제시스템을 찾아야 할 때다.

소수 이론가들이 폭넓은 지적 탐구나 심도깊은 철학적 성찰 없이 단견을
제시한다면 곤란하다.

한국인의 지력을 모아 진지한 검토를 벌여야 한다.

사안이 중요한 만큼 한국인의 사회심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근본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경제는 사람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 chee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