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역사는 성장 신화다.

개발 연대인 67년 5백만원의 봉제수출업체로 출발한 대우는 이후 대미 섬유
수출쿼터를 다량 확보하는 선견지명으로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창업 원년에 수출 실적 5천7백만달러를 올린 것은 당시로선 거의
기적처럼 받아들여졌다.

창업후 10년동안 대부분의 매출을 수출로 일궈냈으며 78년에는 국내 수출
실적 1위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대우는 73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73년 대우기계 74년 대우전자 등 작은 기업들을 인수했다.

이어 76년에는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 전신)을, 78년에는 옥포조선소와
새한자동차 등 대규모 기업을 잇따라 인수해 그룹 면모를 갖춰 갔다.

75년 대우실업이 종합상사로 지정되며 세계화 경영의 초석을 마련했다.

대우는 지난 69년 시드니 지사설립을 시작으로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6대주에 해외 지사를 설립, 일찌감치 세계 경영의 틀을 갖췄다.

대우가 본격적으로 세계경영을 그룹 비전으로 밝힌 것은 지난 93년.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자"는 모토로 전세계 곳곳에서 공격적인 투자
사업을 벌였다.

특히 미수교국인 리비아 알제리 베트남 라오스 등지까지 진출, 개발연대
쌓은 노하우를 전파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협상력과 금융수완을 발휘했다.

물론 대우 신화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89년 대우조선은 세계 조선산업의 불황과 격렬한 노사분규로 파산위기에
처했다.

자체 개발 모델이 하나도 없던 대우자동차는 91년 GM과 갑자기 결별,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때마다 김우중 회장은 특유의 경영수완을 발휘, 위기에 처한 기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 놓았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한국기계도 인수 1년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그때부터 김 회장을 일컬어 "성취욕의 화신" "경영의 귀재"로 불렀다.

이런 대우가 외환위기에 발목이 잡혀 그룹해체의 기로에 섰다.

대우가 마지막 남은 카드로 위기를 극복하느냐에 따라 성장 신화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무역회사로 출발한 대우가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재계
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이익원 기자 iklee@ >

[ 대우그룹 발자취 ]

<> 67년 3월22일 : 대우실업 설립(자본금 5백만원)
창업원년 수출실적 5천7백만달러 기록

<> 69년 8월24일 : 국내기업 해외지사 1호 시드니에 개설

<> 73년 : 대우건설 설립

<> 74년 1월22일 : 대우전자 설립

<> 76년 2월26일 :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 전신) 인수

<> 78년 7월25일 : 새한자동차 인수, 자동차사업 참여

<> 78년 9월26일 : 대우조선 설립
당해 수출 1위기업 부상

<> 81년 10월17일 : 옥포조선소 준공

<> 83년 3월15일 : 대한전선 가전사업 인수

<> 88년 11월 : 헝가리 등 동구권 진출 본격화

<> 93년 3월22일 : 세계경영 선언

<> 94년 10월1일 : 대우중공업, 대우조선 흡수합병

<> 98년 1월9일 : 쌍용자동차 인수

<> 99년 4월19일 :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매각 등 혁신적 구조조정안 발표

<> 99년 7월19일 : 유동성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우중회장 자동차정상화
뒤 퇴진선언

<> 99년 8월16일 : 대우자동차 등 6개사 재편키로 채권단과 특별약정 체결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