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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에세이] 쓸쓸함에 대해 .. 이경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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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호우 직전의 무더운 날 오후였다.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부인이 떡을 들고 왔다.

    떡을 좋아하는 내게 나눠주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은 떡을 보고 기뻐하는 내 앞에서 짜증스런 낯으로 혼잣말을 했다.

    "남편이 벌써 왔네. 더워 죽겠는데"

    순간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 부인은 평소 남편을 섬기는 태도가 거의 신앙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는 남자라고는 남편 밖에 없으며 남편은 그 부인을
    아이처럼 보살피는 것 같았다.

    하루 이틀 사이에 또 한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일요일 저녁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어서 갑갑해 거리로 나와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은 죽어서 남편과 함께 묻히길 바라고 자기가 먼저 죽으면 늙은
    남편이 고생할까 걱정되어 자기가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 보름쯤 전이었다.

    남편이 지방으로 출장을 떠났다.

    아이들은 방학이라 다들 어딘가로 여행을 가서 집엔 오로지 나 하나 남았다.

    얼마나 기쁘던지!

    나는 꼭 처녀 때처럼 하루를 지냈다.

    아무 규칙도 없이 누구를 신경 쓰지도 않고.

    아무 때나 먹고 아무 때나 자고 청소도 하지 않고.

    이를테면 무정부상태로 지낸 것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를 찾은 행복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이튿날 밤 예정보다 일찍 남편이 돌아왔다.

    "아니 왜 벌써 왔어?"

    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물론 이십여 년 전, 남편의 출장 길에 동행하던 적도 있었다.

    순간 남편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미안했다.

    나를 포함한 위의 부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공통점을 잘 헤아려 이 시대 중장년층
    부부들의 쓸쓸함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요새 여편네들은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거나 여성상위가 되어서 미풍양속이
    사라졌다거나 하는 불평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부의 정, 혹은 사랑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다.

    그 최소의 사회적 관계 속에 정치적 경제적 그물망이 얼마나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짜여져 있는지.

    천생연분이라는 꿈으로 "부부유별"을 유지하기엔 이 시대가 너무
    복잡해졌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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