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경제간담회 개최 ]

65년 4월21일 한.일 국교정상화반대 데모는 학생과 야당 연합으로 극으로
치닫는다.

45명의 도코사절단 방한을 저지하려는 중앙대 데모대는 흑석동에서 국립묘지
를 향해 돌진한다.

도코사절단은 급히 국립묘지 참배를 취소하고 샛길로 워커힐로 향했다.

다행히 워커힐까지 데모대는 몰려오지 않아 이튿날 첫 한.일경제간담회가
양국 대표 1백50여명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한국측 대표는 김용완 회장이고 일본측은 도코도시오 단장이다.

이날 양대표의 개회사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오늘 도코 단장을 만나자마자 머리를 쳐다봤습니다.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큰 상처가 나지 않았나 걱정해서였습니다"

김 회장의 첫마디였다.

도코단장은 웃음을 띄면서 몇 올 남지 않은 반 대머리를 쓰다듬어 참석자
에게 보였다.

상처가 없다는 제스처였다.

김회장 개회사는 이어진다.

사무국에서 준비한 원고에서 벗어나 소신을 밝혔다.

"탄환보다 침투력이 강한게 "상품"입니다. 또 군인은 못 뚫어도 상인은
들어간다고 합니다. 일중전쟁시 일본이 상해공격에서 장개석군 방위선을
좀처럼 뚫지 못했지만 중국상인들은 일본시멘트를 구입해 포대구축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양국 경제인들이 원하는 한일경협은 반듯이 이룩될
것이고 누구도 저지 못할것입니다"

이때 장내는 다시 한번 박수가 터졌다.

도코 일본측 단장의 답사가 이어졌다.

고희가 훨씬 넘는 도코단장이지만 단단한 체구에 전신이 기백으로 뭉친
듯했다.

"도쿄 출발 전에 방한을 연기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일간
불행한 과거지사를 생각할 때 돌팔맹이를 몇개 맞지 않고 어떻게 한.일국교
정상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은 이런 각오로 귀국을 방문했습니다"

장내는 또 한번 요란한 박수소리로 메워졌다.

도코단장의 인사말은 계속됐다.

"본인은 이런 긴장속에서 본 사절단을 초청해 주신 김용완 회장과 경제인
협회의 결단에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일본 경제계는 주저없이 한일
국교수립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시작된 제1차 한.일경제간담회는 내실 또한 주목할 만
했다.

일년전(64년3월) 내한한 일본 기계공업연합회가 한국 기계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제안했던 "프로토 타이프(Proto Type) 센터" 설치를 추진키로 합의했다.

또 한.일간 "경제협력위원회"설치 문제도 다음 간담회에 결론짓기로
합의했다.

이 간담회의 이색적인 프로그램은 오키타 사무로 일본경제센터 이사장의
특별강연이었다.

오키타 이사장은 "일본소득배증계획"작성책임자로 해방직후부터 일본경제
부흥 전략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필자와는 초면이었으나 그후 의기 투합해 오기다씨가 일본경협기금총재,
일본 외무장관 등을 거치는 동안에도 친교는 계속 유지했다.

다음은 오기다씨의 특별강연 요지다.

"전후 일본은 패전으로 군 병력 해외교포 귀환 등 8백만명 이상의 인구가
일본 본토에 몰려들었다. 전전에도 한국에서 매년 1천~1천5백만석의 쌀을
도입해야 먹고 살 수 있었던 일본은 패전으로 도저히 먹고 살수 없게 됐다.
천우신조로 50년 한국동란, 동서냉전으로 일거에 실업, 식량, 공업화
문제까지 해결할 계기를 얻었다. 동시에 전후세계 경제는 수송수단, 특히
해운발전으로 자국 내에 천연자원을 꼭 가질 필요가 없게됐다. 대형 수송선
으로 자원빈국인 일본이 공업입국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도 전전의 사고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제강국
으로 자유무역 정책으로 나가고 있으니 이 기회를 활용할 수출산업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금융시장은 자금이 남아도는 상태이니 속히
한국도 세계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 할 수 있는 태세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간담회를 통하여 한국경제발전에 있어서 "전략개념"을 보다 뚜렷이 할 수
있었다.

도코사절단 일행을 보내고 학생 대표들과 토론할 시일을 잡았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