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재혼"의 꿈은 깨졌다.

야심만만한 여걸과 정치적 입지를 확대해가던 에리트 관료출신의 지사는
함께 영어의 몸이 될 처지가 됐다.

성장배경이 전혀 다르면서도 초혼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잘 나가던" 부부는
"과욕" 때문에 함께 추락하게 됐다.

<>두 사람의 성장기=46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 지사는 경기중.고등학교를
어렵게 마쳤다.

신문팔이를 해가며 학교를 다녔다는 게 임지사의 회고다.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때도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수재" 청년은 행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해 경제기획원으로
입성하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맡았다하면 깔끔하게 처리해 단연 두각을 나타내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2명의 딸을 두었지만 14년만에 헤어져야 했다.

반면 주혜란씨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격은 자유분방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대의대에 들어간뒤 서울법대생과 사랑에 빠져 재학중에 결혼을 했다.

가정주부로 머물러야 한다는 남편의 고집과 부딪혀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대학을 마친 후 주씨는 지방의 보건소장을 자원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발령을 내지 않자 보사부 차관실까지 찾아가 충북 현도면 보건지소장으로 첫
발령을 받기도 했다.

<> 미국에서의 만남 =잘 나가던 임 지사는 노태우정권이 들어서자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5공때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국제그룹 해체를 주도한 것이 새정권에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IMF(국제통화기금) 대리이사와 IBRD(세계은행) 이사를 거치면서 워싱턴에서
5년여를 보내야 했다.

의정부 보건소장과 서울 용산보건소장을 거치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전문가가 된 주씨는 90년말 학회참가차 잠시 미국에
들렀다.

그해 12월 주씨의 동생 애리씨의 소개로 두사람이 만났다.

둘의 결혼에는 주씨의 형부인 최창윤 전총무처장관의 역할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씨는 그가 준비하고 있던 자서전에서 "촌스러웠지만 볼수록 매력있었다"
고 적고 있다.

임 지사는 자서전 "난파선의 키를 잡고"에서 "주여사는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만난지 두달만인 91년2월 워싱턴의 교회에서 촛불 결혼식을
올렸다.

<> 결혼 후 갈등 =임 지사의 두딸과 주씨의 외동딸 문제로 두사람은 종종
말다툼을 했다.

각자의 부모를 "아저씨"와 "아줌마"로 불러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91년말 미국생활을 끝내고 들어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별거설"까지
나돌았다.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임씨는 재정경제원 차관과 통상산업부 장관을
거쳐 97년11월 재정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성격이 판이한 두사람 사이의 갈등은 내연했다.

화려한 행사를 즐기고 "튀는" 행동이 잦은 주씨는 종종 구설수를 일으켰다.

그렇게 많은 "말"의 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운명을 맞게 됐다.

< 고기완 기자 dadad@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