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58)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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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경제인협회 방문 ]
근대국가에는 새 변천에 대응할수 있도록 각종 기능을 담당할, 정부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비정부기구(NGO)이 있어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 기술개발 그리고 시장경제를 이끌 각종 기구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60년 초 개방경제와 수출주도 발전 전략을 위해 "수출산업촉진
위원회"를 출범시킨 것도 이런 생각에서였다.
또한 근대국가나 시장경제운영에 있어서 그 주체들이 "정보에 뒤지면 패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이는 18~19세기, 우리 민족이 외침을 당하는 과정을 공부하며 필자가 얻는
교훈이다.
바깥 세상을 너무나 몰랐기 때문에 쇄국으로 나라를 잃었다.
이런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경제계에서 만이라도...".
이것이 바로 필자가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으로서의 첫 다짐이자,
목표설정이었다.
이는 바로 필자가 각종 경제기구를 만든 기본 동력의 하나이다.
(근대화이론과 조직형성에 대해서는 이후 별도로 다룰 계획임)
62년 11월초 사무국장으로 취임 직후 영국정부 초청으로 영국 사찰단에
참가한 것은 위에서 언급했다.
공식 일정에 짬을 내서 영국경제인연합회(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
현재 Confederation으로 개칭)를 11월 말께 방문했다.
당시 한국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동란을 통해 그 참상과 함께 겨우
알려진 나라, 끈질긴 교섭 끝에 나는 국제담당 이사를 만났다.
"산업혁명의 발생지 대영제국 선진공업국 세계금융의 총본산인 귀국에서
여러 가지 배우려고 찾아왔습니다" 나는 어딜 가나 "배우러왔다"는 인사말을
했고 다음으로 "정보 교환을 하자"고 제안했다.
"대영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해체됐습니다. 이제는 선진공업국도 아니고
겨우 런던 금융시장만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요."
쉰이 갓 넘어 보이는 곱게 생긴 여성국제담당이사는 영국 특유의 자제된
말투로 응답한다.
"한국은 아직 저개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국에서
배워야 합니다. 경제인협회와 귀연합회가 정보교환 등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양국 "협력위원회"구성은 웃음을 살까봐 입밖에도 못 꺼냈다.
국제이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래요. 초보적인 경제정보같은
것은 교환할 수있겠지요"
나는 이 한마디에 호랑이라도 잡을 듯한 용기가 용솟음쳤다.
이렇게 시작한 영국경제인연합회와의 관계는 만 12년 후 한.영경제협력
위원회 설립으로 발전했다.
이 설립은 한.불 한.독 스웨덴, 화란, 스위스 등 유럽 10개국 "양국협력
위원회"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98년)에는 ASEM 정상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영국경제인총연합회에서 양국 경제협력증진을
역설하는 강연을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한 창구는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
정보나 사상은 여러 갈래가 있어야 서로 비교되고 특히 충돌하는 과정에서
비판의식과 창의가 움튼다.
이 과정이 바로 사회와 문화 발전의 약동하는 모습으로 인류사에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고 나는 한.일관계 증진에도 임했다.
5.16 후인 62년 7월 이병철 경제인협회 회장은 미국 벤프리트 장군 일행을
"울산공업센터"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초청한 후(5월) 곧이어 일본경제계와
제휴를 모색했다.
누차 언급했지만 이병철회장 만큼 정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실천에 옮긴
기업인을 나는 아직 못봤다.
7월 일본재계 총본산인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약칭)과 울산공업센터투자
등 한.일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단련은 우에무라 상근부회장을 단장으로 수명의 재계중진
을 파견했다.
이들은 판문점 최전방 울산공업센터등을 두루 살폈다.
우에무라 단장은 이한 전야(62년 9월 24일) 조선호텔 송별연에서 다음과
같은 방한 소감을 피력했다.
"우리 일행은 이번 한국에 오길 잘했다. 한국이 자유진영 방공 최일선에서
막대한 병력과 국방비를 투입하고 있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한국은
앞으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일본도 긴밀히 협력할 용의가
있다"
우에무라는 귀국 후 그해 12월10일 안도 오노다시멘트 사장 등 25명의
중진 경제시찰단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나는 영국 시찰 귀국길에 동경에서 안도 사절단과 같은 비행기로
서울에 왔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2일자 ).
근대국가에는 새 변천에 대응할수 있도록 각종 기능을 담당할, 정부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비정부기구(NGO)이 있어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 기술개발 그리고 시장경제를 이끌 각종 기구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60년 초 개방경제와 수출주도 발전 전략을 위해 "수출산업촉진
위원회"를 출범시킨 것도 이런 생각에서였다.
또한 근대국가나 시장경제운영에 있어서 그 주체들이 "정보에 뒤지면 패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이는 18~19세기, 우리 민족이 외침을 당하는 과정을 공부하며 필자가 얻는
교훈이다.
바깥 세상을 너무나 몰랐기 때문에 쇄국으로 나라를 잃었다.
이런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경제계에서 만이라도...".
이것이 바로 필자가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으로서의 첫 다짐이자,
목표설정이었다.
이는 바로 필자가 각종 경제기구를 만든 기본 동력의 하나이다.
(근대화이론과 조직형성에 대해서는 이후 별도로 다룰 계획임)
62년 11월초 사무국장으로 취임 직후 영국정부 초청으로 영국 사찰단에
참가한 것은 위에서 언급했다.
공식 일정에 짬을 내서 영국경제인연합회(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
현재 Confederation으로 개칭)를 11월 말께 방문했다.
당시 한국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동란을 통해 그 참상과 함께 겨우
알려진 나라, 끈질긴 교섭 끝에 나는 국제담당 이사를 만났다.
"산업혁명의 발생지 대영제국 선진공업국 세계금융의 총본산인 귀국에서
여러 가지 배우려고 찾아왔습니다" 나는 어딜 가나 "배우러왔다"는 인사말을
했고 다음으로 "정보 교환을 하자"고 제안했다.
"대영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해체됐습니다. 이제는 선진공업국도 아니고
겨우 런던 금융시장만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요."
쉰이 갓 넘어 보이는 곱게 생긴 여성국제담당이사는 영국 특유의 자제된
말투로 응답한다.
"한국은 아직 저개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국에서
배워야 합니다. 경제인협회와 귀연합회가 정보교환 등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양국 "협력위원회"구성은 웃음을 살까봐 입밖에도 못 꺼냈다.
국제이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래요. 초보적인 경제정보같은
것은 교환할 수있겠지요"
나는 이 한마디에 호랑이라도 잡을 듯한 용기가 용솟음쳤다.
이렇게 시작한 영국경제인연합회와의 관계는 만 12년 후 한.영경제협력
위원회 설립으로 발전했다.
이 설립은 한.불 한.독 스웨덴, 화란, 스위스 등 유럽 10개국 "양국협력
위원회"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98년)에는 ASEM 정상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영국경제인총연합회에서 양국 경제협력증진을
역설하는 강연을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한 창구는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
정보나 사상은 여러 갈래가 있어야 서로 비교되고 특히 충돌하는 과정에서
비판의식과 창의가 움튼다.
이 과정이 바로 사회와 문화 발전의 약동하는 모습으로 인류사에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고 나는 한.일관계 증진에도 임했다.
5.16 후인 62년 7월 이병철 경제인협회 회장은 미국 벤프리트 장군 일행을
"울산공업센터"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초청한 후(5월) 곧이어 일본경제계와
제휴를 모색했다.
누차 언급했지만 이병철회장 만큼 정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실천에 옮긴
기업인을 나는 아직 못봤다.
7월 일본재계 총본산인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약칭)과 울산공업센터투자
등 한.일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단련은 우에무라 상근부회장을 단장으로 수명의 재계중진
을 파견했다.
이들은 판문점 최전방 울산공업센터등을 두루 살폈다.
우에무라 단장은 이한 전야(62년 9월 24일) 조선호텔 송별연에서 다음과
같은 방한 소감을 피력했다.
"우리 일행은 이번 한국에 오길 잘했다. 한국이 자유진영 방공 최일선에서
막대한 병력과 국방비를 투입하고 있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한국은
앞으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일본도 긴밀히 협력할 용의가
있다"
우에무라는 귀국 후 그해 12월10일 안도 오노다시멘트 사장 등 25명의
중진 경제시찰단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나는 영국 시찰 귀국길에 동경에서 안도 사절단과 같은 비행기로
서울에 왔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