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이다.
고인돌은 하나씩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묘처럼 서로 붙어서
모여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대구 상동에는 약 2백여평의 면적에 40기가 넘는 고인돌이 모여 있기도
하다.
고인돌은 그 크기가 거대한 것도 있고 부장된 유물의 양에도 차이가 있어
계층의 분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복합사회로 가고 있는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칼, 돌로 만든 화살촉, 요녕식동검, 붉은 간토기,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대릉옥 등이 나오고 있다.
고인돌 문화 다음 단계에 오는 것이 한국식 동검문화인데 이 문화는 한국식
동검, 고리가 2개 이상 달린 고운 기학학 무늬가 있는 청동거울, 청동방울,
동과, 동모, 검은 간토기, 점토대 토기 등의 문화요소로 특징 지워진다.
출토되는 무덤도 고인돌이 아니라 적석목관묘와 토광묘 등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식 동검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 시작되어 3~2세기에 전성기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한국식 동검문화는 철기문화의 도입과 더불어 점차 쇠퇴되고
의기화되지만 경주 사라리 130호분 출토 자료나 창원 다호리 1호분 출토 자료
등이 보여주 듯 그 전통은 삼한시대까지 일부 지속되어 우리의 조상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식 동검을 내는 무덤도 고인돌과 구분되고 함께 나오는 유물들도 고인돌
에서 나오는 유물과는 달라서 문화적 계속성이 없어 보이고 단절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국 마을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을 축조했던 사람들이
청동기시대 후기와 초기철기시대에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국식 동검
문화를 만든 사람들로 대체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납득되지 않는 점이
많이 있다.
아마도 서로 지속적 관계를 가지고 한국식 동검문화에 흡수.동화되거나
고인돌 사회 사람들이 스스로 한국식 동검문화를 채용하여 발전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그 변화과정은 지역마다 관련된 사람들의 사회적 전략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조상의 직접적 뿌리를 밝히는 일이 고인돌의 연구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고 아직 밝히지 못한 의문점이 수두룩하다.
고인돌의 체계적인 발굴과 보존, 그에 필요한 전문연구인력의 확충이 절실히
요구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