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만 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수사를 달고 다니는
정치인들.

구태를 답습하고 있지만 힘없는 국민들로선 도무지 그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천적이 있기 마련이다.

이석연 변호사.국내 유일의 헌법소송 변호사다.

바로 정치인들이 가장 꺼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의 미사여구도 이 변호사에겐 통하지 않는다.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원칙론자인 그에게 잘못 걸리면 십중팔구 곤혹을
치루기 십상이다.

그의 별명의 "헌법의 파수꾼"이다.

"돈"이 안돼 변호사들이 맡기를 꺼리는 헌법소송분야가 그의 업무다.

"돈 안되는 일만 골라 한다"는 핀잔도 많이 듣지만 국가공권력으로부터
시민권익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완고"하다.

"돈욕심"이 없다보니 상대방이 가장 어려워할 수 밖에 없다.

경쟁자도 없어 그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지난 95년 대한민국 선거지도를 바꿔 놓았다.

헌법소송을 통해 여야가 당리당락을 위해 합의한 "나눠 먹기식" 지역구
선거구획안을 뒤엎은 것이다.

지난 97년에는 의원들의 도덕불감증을 질타했다.

발단은 의원들의 기습적인 세비인상.

IMF 여파로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와중에서 나온 어이없는 구태였다.

이 변호사는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국민들의 들끊는 여론에 밀린 국회는 결국 세비인상안을 철회했다.

헌법전문 변호사로서 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계기가 됐다.

전직 대통령과 정부 부처도 감시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관한 법률"은 이 변호사의 헌법소원 직후 내용이
바뀌었다.

불법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했을때는 지원금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방향
으로 법이 개정된 것.

군사구데타와 비자금사건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당장
영향을 받았다.

"고엽제 후유증환자의 진료 등에 관한 법률"도 따끔한 지적을 받았다.

보건복지부는 군무원 등을 부랴부랴 진료대상에 집어 넣은 촌극을 연출했다.

그가 지금까지 수임한 헌법소송은 대략 30여건.

헌법재판소가 이의 있다고 받아들인 사건은 10여건에 달한다.

헌법소송의 평균 성공율이 1~3%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탁월한 성적
이다.

동료변호사들은 이런 실적을 "명예의 전당에 기록할만큼 경의적인 것"
이라고 감탄한다.

이런 역량 덕분에 정치권의 유혹도 적지 않았다.

총선때면 여야로부터 쇄도하는 출마권유에 시달렸다.

"참신성"은 정치판에서 가장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상품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어려운 정치판에 뛰어드는 용기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용기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헌법소송만을 고집하고 있는데는 사연이 있다.

78년 전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다음해 행정고시에 합격, 법제처에서
법제관으로 근무했었다.

그는 85년 뒤늦게 다시 사법시험에 합격, 89년 헌법재판소 창설과 함께
헌재로 자리를 옮겼다.

만 6년간 상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의외로 현형법에 위헌요소가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헌재내에서도 종종 올곧은 소리를 내 "소신파"로 불렸다.

그러나 대법관을 보조하는 연구관의 한계를 느낄수 밖에 없었다.

그는 94년 변호사개업을 시작으로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헌법에의
의지"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도 이젠 변신을 준비중이다.

시대가 필요로하는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이 변호사는 지난 40여년간 소비자 운동에 정열을 바친 미국의 랄프 레이드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한다.

헌법 소송 이외에 소비자.환경.복지문제와 집단 소송 등 이른바 "현대형
소송"에 전념할 계획이다.

< 김태철 기자 synergy@ >


[ 특별취재팀 = 최필규 산업1부장(팀장)/
김정호 채자영 강현철 이익원 권영설 이심기(산업1부)
노혜령(산업2부) 김문권(사회1부) 육동인(사회2부)
윤성민(유통부) 김태철(증권부) 류성(정보통신부)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