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완전히 끝났구나"

지난해 10월 일본리스사의 직원들은 패배감에 젖어 참담하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가 도산사태를 맞으면서 법정관리를 신청(회사갱생법 적용신청)했기
때문이다.

부실채권이 많았던데다 모기업인 일본신용은행이 결국 주저앉고 만 것이
도산의 배경이다.

이 회사의 주가는 "0"이 됐고 기업 가치 역시 제로가 됐다.

그로부터 두달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세계 최대의 비은행 금융기관인 GE캐피털(GEC)이 이 회사를 사들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네럴 일렉트릭 그룹의 계열사인 GEC는 그룹전체 이익의 40%를 벌어들이는
고능률의 알짜회사다.

그런 GEC가 절망 뿐인 것처럼 보이는 회사를 사들이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의외였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1백여명의 인원을 동원해 실사를 끝마친 GEC는 이 회사의 가치를 8천7백억엔
으로 평가(계열사인 일본리스 오토 포함)하면서 회사를 매입했다.

GEC는 일정 자본을 투입한 후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ROE(자기자본 이익률)
로부터 기업가치를 역산해 냈다.

사실 일본의 은행들 중에도 이 회사의 인수에 뜻을 둔 곳은 꽤 있었다.

그러나 부실채권에 눈을 빼앗겨 인수를 망설이고 있었다.

이 사이 GEC는 재빨리 법정관리인과 독점 교섭권을 따낸후 전격적으로
기업인수를 성사시켰다.

이 사건은 기업의 가치와 미래전망에 대한 일본기업들의 시각을 새롭게
바꿔주는 계기가 됐다.

카를로스 곤씨(45).

6천4백30억엔을 투입해 닛산자동차지분 36.8%를 취득키로 한 르노자동차의
수석부사장이다.

"코스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오는 6월말 열리는 닛산자동차의
주총에서 부사장이자 COO(최고집행책임자)로 선임된다.

곤 부사장이 부임에 앞서 주로 면담하는 사람은 실무선의 부장급들이다.

이미 1백명 이상을 만나 회사에 대한 불만 등을 세밀히 조사하고 있다.

중역급들은 그의 면담상대가 아니다.

밑으로부터 회사를 개혁하기 위함이다.

기존 중역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없다.

이제는 언제라도 쫏겨날 수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닛산에는 두 종류의 부채가 있다.

회사측의 공식발표로는 금융자회사를 포함해 유이자부채는 2백64억달러(약3
조1천억엔)다.

그러나 르노가 국제회계기준으로 계산한 부채는 4백20억달러(약5조엔)에
달한다.

닛산측은 르노의 수치는 단순한 참고자료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경영계획의
토대는 르노측의 계산에 기준해 마련키로 했다.

있는 그대로를 노출한 상태에서 재건계획을 짜자는 취지다.

신일본제철의 경우는 지난해부터 교제비의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사내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내용을 투자자 등 외부사람들에게도
노출하고 있다.

지출을 투명화하는 한편 비용절감을 꾀하자는 목적이다.

그런가하면 히타치 크레디트는 회사가 보유한 골프장 회원권 가격을 더이상
낮출 수없는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장부가로 1엔이다.

자산평가액이 필요 이상으로 부푸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일본기업들은 최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경제붕괴의 원인이 된 거품을 빼내고 기초를 다시 세우는데 혈안이
돼있다.

세계기준에 적합한 모델을 도입하는가 하면 투명한 회계기준을 만드는 데도
열심이다.

이를 위해 외국인 사령탑을 받아들이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주가가 오름세를 타고 경기가 조금 나아지자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구조조정
열기가 어느새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사람을 좀 잘라낸 외에 IMF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기업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사회적으로도 사치품 수입이 급증하고 대형아파트 청약에 밤새워 줄을 서는
등의 거품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상당부분의 구조조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건비를 얼마 줄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국제적 기준에 기초해 회사의 현재 가치와 수익성은 얼마나 되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기업의 내일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IMF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문화를 바꾸라는 것이다.

신일철 처럼 교제비 내역을 공개했다면 모 그룹회장의 이야기처럼 "밝히기
곤란한 곳"에 돈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고급 옷 로비"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기업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경제의 내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나라의 내일도 없다.

< bk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