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인간이 사람을 지배하는 최악의 사태가 온다면 인류를 구원할 슈퍼스타
는 어떤 모습일까?

미국의 흥행대작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사이버 구원자"의 조건은 이렇다.

첫째, 총을 능란하게 다루는 건맨이어야 한다.

서부극에 흔히 등장하는 쌍권총 솜씨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열자루 정도는 품고 자유자재로 골라 쓰는 민첩함이 있어야
합격이다.

둘째, 동양무술에 통달해야 한다.

여기엔 중국의 쿵후-취권과 함께 한국의 태권도까지 포함된다.

이소룡이나 황비홍의 실력을 뛰어 넘어 연발총의 탄환틈으로 몸을 날릴
정도는 돼야 자격이 있다.

셋째, 밧줄을 잘 타야 한다.

배트 맨을 능가하는 와이어 스턴트 기량도 없으면서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선다면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영화적 상식으로 볼 때 이상 세가지 초능력을 모두 갖추려면 적어도 50년의
수련기간이 필요하다.

쌍권총과 무예의 고수를 만나 심산유곡에서 아무리 피나는 수련을 한다 해도
백발 할아버지가 되기 전까지는 득도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대들은 그런 늙은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봤는지
"매트릭스"는 젊고 핸섬하며 날렵한 키아누 리브스를 내 세웠다.

그런데 이 무명의 해커가 괴력의 무술인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5분이면
족하다.

필요한 것은 사부님이 아니라 무술 프로그램이 수록된 디스켓 몇장일 뿐.

간단한 컴퓨터조작만으로 겁많던 청년은 동서고금의 무예에 도통한 수퍼 맨
으로 변신한다.

본격 사이버시대가 열리면 태권도장이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매트릭스"의 시대배경은 2199년.

그러나 주인공의 현실세계는 1999년으로 나와 헷갈린다.

알고 보니 컴퓨터가 인간의 기억장치를 1백년전으로 되돌려 놓은 음모의
결과다.

컴퓨터를 만든 인류는 결국 컴퓨터의 노예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경고메시지
가 요소에 깔려 있다.

벽두부터 현실과 가상현실의 차이가 뭐냐는 이상한 화두를 던져 "웬 선문답"
인가 싶더니 잇달아 문명비평가들이 씀직한 고급언어들이 쏟아져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인류를 연구해 보니 진정한 포유동물이 아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본연의
모습을 잃고 환경파괴를 일삼는 것이 그 증거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인간에게 보낸 야유다.

기계인간들은 그래서 통제수단으로 인간농장을 차리고 다량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에너지 공급원으로 삼는 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악당들에겐 그럴듯한 명분을 주면서도 그에 맞서 싸우는
해방전사에겐 무자비한 폭력능력을 부여한 것은 우습지 않은가.

이 영화가 더욱 웃기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아-부활사상을 차용한 점이다.

인간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구원자를 되살리는 설정이 그것이다.

해방전사가 연인의 키스를 받고 소생하는 부활장면이 걸작이다.

사이버시대에선 달콤한 키스가 부활촉진제로 작용할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영화가 미국서 개봉 7주만에 1억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니
미국이야말로 구원자가 가장 필요한 나라일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 4월 덴버에서 발생한 학교총격사건(15명 사망)의 범인
"검은외투 마피아"들이 "매트릭스" 주인공의 검은 차림과 흡사하다 하여
폭력영화의 유해론이 제기되고 있다.

[ jsrim@ <편집위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