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보고서로 몸살을 알아온 한반도에 이번에는 길만(Gilman) 법안이라는
돌출변수가 발생했다.

아직까지는 필리핀 근해에서 형성된 태풍 정도로 그 강도가 실감있게
느껴지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 예측불허의 태풍으로 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평양방문으로 말많던 페리보고서가 이제 윤곽을 드러내려는 시기에 맞춰진
이 법안의 목적과 동기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들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주 벤자민 길만 하원국제관계위원장에 의해 의회에 제출돼 길만 법안
으로 불리는 북한위협감소법안(North Korea Threat Reduction Act)은
국제사회일원으로서의 북한이 주변 당사자들을 만족시켜야 할 조건과 족쇄의
강도를 한층 높여놓은 것이 그 골자라면 골자다.

길만 법안은 핵무기 미사일 등 북한이 외부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또 그같은 노선을 견지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너지개발
기구 (KEDO)에 대한 지원 등 이미 집행이 승인된 사업들에 대해서도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난 77년부터 미국기업들의 대북한 거래를 차단해온 적성국
거래법(Trading with the Enemy Act)도 북한에 대해 그대로 유지적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페리조정관이 핵무기와 미사일개발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북한에 대해
경제봉쇄완화 등을 제안할 지 모른다는 일반의 추측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페리조정관이 당근과 채찍 양면을 함께 구사할 것으로 보이는 반면 길만은
채찍일변도의 노선과 훨씬 강도높은 족쇄를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놓고 주변에선 북한을 상대로 미 행정부와 의회가 짜고 치는
고스톱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길만 법안이 노리는 것은 2000년 대선을 내다보고 클린턴과 민주당을
흠집 내려는 데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간 클린턴행정부가 취하고 있는 포용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온 길만
의원은 대북한 강경 매파이자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으로 공화당주도의 의회내
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협상뿐 아니라 이 법안제안자
인 길만 의원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설득도 병행해야 하는 어려운 부담을
안게 됐다.

당연한 여파로 김대중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도 길만 법안이 잠재적
으로 지니고 있는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길만 법안은 중국지역의 북한난민문제 해결을 위해 3천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따로 배정해 놓아 종전의 고정된 의제에서 한걸음 더 진전된 면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 법안이 북한 신포에 건설되고
있는 경수로발전소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내 일부에서는 경수로발전소건설보다는 재래식 화력발전소가
경제성이나 실효성에 있어 더 이상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같은 견해를 의식한 듯 길만의원은 클린턴으로 하여금 법안통과 후 90일
이내에 경수로를 포기하고 화력발전소를 채택할 경우 발생하는 <>경비절감
<>완공시기단축 <>배전 시설투자에 대한 경비감축 등 장점을 면밀히 조사분석
, 그 결과를 의회에 보고토록 요구하고 있다.

문맥으로 보아 화력발전소가 경수로 발전소보다 훨씬 좋은 대안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한 느낌마저 던져주고 있다.

미국사람들의 논쟁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지든 우리가 염원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북한주민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화력발전소로의 궤도수정은 94년 제네바 핵합의의 휴지화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모든 당사자들이 수긍하는 대안이라면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할
이유는 결코 없다.

그런 의미에선 길만 법안에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워싱턴특파원 양봉진 http://bjGloba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