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차린 노작가의 팔순 잔치상"

원로작가 김준성(80)씨가 중견 작가 5명과 팔순 기념 소설집을 묶어냈다.

올해 등단 42년째를 맞은 김씨는 최고령 현역작가.

3년전 희수기념으로 문학전집을 낸데 이어 최근까지 연간 3~4편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요즘도 저녁 8시반부터 2시간씩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를 쓴다.

그의 잔칫상을 함께 준비한 후배작가는 이청준 김주영 한승원 김원일
이문열씨.

내로라 하는 한국의 대표작가들이 원로의 아름다운 "팔순 문학"을 축하하기
위해 작품을 선사했다.

이 소설집에는 동양적 한의 정서를 토속적으로 풀어낸 이청준씨의 "네가
네 사촌이냐", 걸쭉한 입담과 해학이 돋보이는 김주영씨의 "금의환향", 남도
서정을 밀도있게 그린 한승원씨의 "검은댕기두루미", 분단비극을 파헤친
김원일씨의 "세월의 너울", 타고난 이야기꾼 이문열씨의 "달아난 악령"이
실려 있다.

김준성씨는 신작 "먼 그대의 손"으로 화답했다.

이 작품은 IMF체제 이후 실직한 대기업 과장의 애환과 가족의 아픔을 그린
것.

경제적 충격으로 파괴된 가정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따뜻한 인간관계
라는 진리를 일깨운다.

김씨는 "작가생활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와 부총리를 지낸 그는 이수화학 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뛰고
있다.

현직 기업인으로서 경제현실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소설 재료도 그
쪽에서 많이 얻는다.

IMF체제에서 지난해 매출을 5백%나 늘렸지만 그의 심정은 착잡하다.

"사회 전체가 뒤뚱거리고 있어요. 경제성장 이후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지금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치관 혼란이지요"

그는 보험금을 타려고 다리를 자른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이를 소재로 중편
소설을 쓰는 중이다.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남의 생명까지 천하게 여기는 사회가
안타까워 제목도 "죽음의 조건"(가제)이라고 붙여놨다.

원고지 3백장 분량의 초고를 몇번씩 고쳐 쓰면서 그는 우리시대 진정한
삶의 좌표를 찾는데 골몰하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작가는 더 큰 몸살을 앓는다.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위기를 먼저 감지하고 경고음을 보내는 게 책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감성의 촉수가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얘기다.

그는 "한달 원고량이 단편소설 1편 정도 되는데 힘이 닿는다면 울림이 큰
장편소설을 더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틀에 한 권꼴로 책을 읽으면서 "10년만 젊어도 새 공부를 시작할텐데..."
라고 아쉬워하는 그는 아직도 갓 등단한 신인처럼 젊어 보인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