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 중앙대교수/경제학 >

벤처산업은 "국민의 정부"로 불려지는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세간의
관심을 끈 분야이다.

정부 당국은 새로운 경제적 과제가 대두될 때마다 우선 "벤처기업 육성"
이라고 외친다.

최근엔 고실업 시대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해결사로 또 벤처산업을 등장
시켰다.

정부가 수천억원의 공적재원을 투입하여 세제와 금융지원을 하면 몇천개의
벤처기업이 생겨 몇십만명의 일자리가 금세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긴다.

벤처산업이 우리의 미래를 맡길 국민적 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허허벌판에 불과한데 장밋빛 화원의 꿈만 덧없이
커지는 것은 혹시 아닌가.

많은 사람이 이 그림에 도취되는 이즈음에 누군가가 벤처기업이 어떤
것인지, 우리땅이 벤처의 꽃을 가득 피우기에 과연 적합한 곳인지 한번
따져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벤처기업은 이름 그대로 모험(venture) 기업을 의미한다.

모험은 위험에 도전한다는 뜻이다.

콜럼버스와 마르코 폴로는 전시대의 전형적인 모험기업가였다.

그 시대에 몇명의 모험가들이 비단과 향료, 도자기를 유럽에 들여와 수십배
남는 장사에 성공했다.

그 이면에는 산적과 풍랑, 음모와 풍토병으로 희생된 몇십명의 모험상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아이디어와 고부가가치에 도전하는 벤처산업이라고 그 생존율
이 높을 수 없다.

이익이 클수록 위험도는 높다.

성공하여 각광받는 모험자 뒤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좌절자가 있는 것이 고금
불변의 세상이치 아닌가.

세계에는 대기업이 잘 되는 땅이 있고, 중소기업이 잘되는 땅, 벤처가 잘
되는 땅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 땅인지 한번 보자.

큰 것이 우대 받고, 큰 조직에 들어가야 출세길이 열리는 땅이다.

우리의 교육과정이 머리가 형성되는 청소년을 몽땅 주입과 시험으로 다져서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 찍어내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만사를 포기하고 암기만 잘하는 사람이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도
되고 고급공무원이 될 수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벤처산업은 이렇게 고정적 사고가 뼛속까지 틀어 박힌 분들이
관장하는 행정 사법 서비스 밑에서 그보다는 조금 덜 고정된 머리를 가진
시민의 창업에 의존하여 성장할 "계획"이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이 벤처사장보다는 판.검사가 되기를 희망하리라고
믿는다.

필자도 이런 땅에서는 벤처사업에 성공할 확률이 고시에 합격할 확률보다
절대로 높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A사장은 원청기업의 요구에 따라 제품을 개발하고 큰 낭패를 보았다.

이 제품이 성공하자 1년 뒤에 그 기업에서 이것과 아주 유사한 제품의
생산사업부를 본격적으로 차렸기 때문이다.

A사장은 물론 다시는 신제품개발 같은 어리석은데 손대지 않을 것이다.

B씨는 수십년간 수백회의 좌절된 시도로 청춘과 재산을 날린 끝에 지금 그의
최근 발명품사업이 히트하여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은 성공이 유사.모조품이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우리의
시장에서 언제까지 유지될지 누가 확언할 수 있겠는가.

신뢰 신용이 전무하다고 할 우리 사회의 문화적 풍토는 아마도 벤처산업을
걸고 넘어지는 가장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

오늘날같이 경쟁적인 세계경제환경 속에서 하이테크 뉴아이디어 고부가가치
의 벤처산업이 이끄는 경제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벤처기업에 우호적인 경제와 사회적 풍토를 조성
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찬성할 일이다.

그러나 의지가 지나쳐서 당국은 벤처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부르짖고
국민 모두가 벤처기업으로 성공하겠다는 환상에 빠진다면 이것은 말릴
일이다.

아직은 우리 사회가 대학입시는 제쳐두고 사고영역을 넓힌다고 독서하고
여행하는 아들을 용서할 수 없다.

아이디어 사업이라고 원조를 요청하는 조카를 피한다.

이런 사업에 자발적으로 대출해 줄 은행도 없다.

그런데도 당국은 벤처사업이 불패신인양 감언과 특혜로 투자자를 유인하고
생존가능성이 불확실한 이 사업에 은행대출을 강요한다면, 실패자의 양산과
국민경제의 부실로 이어지는 국가의 고의적 유도행위로 귀결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지금이 척박한 땅에 무조건 꽃씨를 뿌리기보다 벤처가 자생할 옥토를
조성하는 먼 과정을 시작할 단계라고 본다.

지금부터 우리의 교육제도를 개방적으로 고치고, 사법.행정제도를 개혁하고,
정의와 신뢰도를 높이는 인간교육에 국민 모두가 진정하게 참여하면 30년
뒤에는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극성스러운 벤처경제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