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었다.
식사도중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하거나 어른들 얘기에 끼어드는 일도 용납
되지 않았다.
맛있는 반찬은 으레 아버지 앞에 놓였다.
그런 억눌림에 대한 반작용이나 보상심리 탓일까.
요즘 부모는 아이들이라면 사죽을 못쓴다.
어쩌다 외식을 할때도 부모의 식성과는 상관 없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나 피자집으로 향한다.
연로한 부모용돈은 줄여도 아이들 학원은 여간해서 못끊는다.
어떻게든 자식 기를 안죽이려다 보니 당연히 야단칠일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식당이나 버스 지하철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고 떠들어도 제지하기
는 커녕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부모가 태반이다.
동물은 물론 식물도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면 잘 큰다.
하물며 아이들임에랴.
그러나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나 지나친 관용, 빗나간 교육열은 진정한 사랑
이라고 보기 어렵다.
''기죽지 말라''는 자칫 이기적이고 무책임할뿐만 아니라 방종한 아이를
만들기 십상이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이 어린이날을 제정할 당시 이땅의 아이들은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보장받기 어려웠다.
애들이나 애놈 대신 ''어린이''로 부르자고 제창한 데는 그들을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뜻이 강했다.
오늘날 상황은 그때와 전혀 다르다.
어린이날 또한 당초 취지와 달리 원하는 물건을 사주거나 놀이기구를
태워주는 날로 변질된 감이 짙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 주인공 수지는 애들싸움에 너무 과민
하지 않느냐는 남편에게 "일곱살이면 무슨 짓이든 할수 있다"고 말하거니와
실제 아이들은 천진무구한 한편으로 놀라울만큼 정확한 판단력을 발휘한다.
아이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건 조건반사에 의해 그래도 된다고 믿기 때문
이다.
우리 사회엔 아직 힘겨운 사람들이 많다.
이번 어린이날을 계기로 우리 모두 장차 이땅의 주인될 아이들에게 소파의
참정신을 가르쳤으면 싶다.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고 도와갑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