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건 사장은 운동권 출신 중소기업가다.

충남대 화공과를 나온 그는 학생운동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른 탓에 졸업하는
데만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지난 80년 제적당한 그는 85년 2월 복교하기까지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책을 팔기도 했다.

특장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첫 직장으로 대우자동차에 다닌게 인연이
됐다.

대우차를 나온뒤 95년 창업하기까지 2년6개월 동안 순천의 한 중학교에서
기술교사를 하기도 했다.

과거에 안주하기를 싫어하는 그는 창업 초기부터 남들이 안하는 아이템을
찾았다.

액체유황을 옮기는 탱크트럭이 그렇다.

초기엔 중견 업체에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으로 공급했다.

"납품한 다음 달에 4개월짜리 어음을 주더군요" 원자재 대금을 회수하는데만
9개월이 걸려 도저히 기업을 꾸려갈 수 없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여의도의 한 파이낸스사에서 받은 설움은 독자브랜드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다.

"1천1백만원짜리 어음을 줬더니 1천만원이 손에 쥐어지더군요"

여의도 다리를 건너면서 황 사장은 눈물을 흘렸다.

그날 회사에 돌아온 그는 직원들 앞에서 평생 OEM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
했다.

"하청업체라는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는 중소기업도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술력이 뒷받침될때 대기업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할 수 있다는게 그가
터득한 지혜다.

여기에 도덕성까지 갖춰야 성장할 수 있다고 그는 얘기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