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속의 시대다.

뒤돌아 볼 틈이 없다.

"전진 앞으로"란 팽팽한 긴장의 구호만이 나부낀다.

한발짝이라도 뒤쳐지면 영원한 낙오다.

그게 지금 우리사회를 짓누르는 강박관념의 발단이고 21세기의 생존법칙
이기도 하다.

60년대는 어떠했는가.

"느림"의 시대다.

"잘살아보세"란 결의의 한켠에는 여유와 순수가 있었다.

살아가는게 시발택시 속도를 넘지 않았던 그때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시선이 따뜻했다.

추억이 층층이 쌓였고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가슴설랬다.

시간이 머무르는 너그러운 안식처.

멀리 있지도 않다.

바로 40년전이다.

이영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마음의 풍금"은 그 그리움과 설레임으로의
시간여행이다.

열일곱 늦깎이 여자초등학생의 첫사랑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빛바랜 흑백사진에 색깔을 덧칠해 복원한 순수의 풍경이다.

여행은 완행열차를 타고 떠난다.

사범학교를 갓졸업하고 강원도 산골마을 산리의 초등학교로 부임하는
수하(이병헌).

완행열차를 타고서도 멀미를 하는 그는 암띠고 부끄럼 많은 스물한살의
샛님이다.

첩첩산중의 산리에 도착한 그는 홍연(전도연)에게 길을 묻는다.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은 자기를 "아가씨"라 불러준 첫번째 남자 수하에게
첫사랑을 느낀다.

홍연은 자기의 담임이 된 수하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일기장을 통해 수줍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수하의 마음은 연상의 동료여선생 은희(이미연)에게 쏠려있다.

어느날 은희는 서울의 약혼자와 유학길에 오른다.

수하는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지만 홍연의 가슴은 기쁨으로 콩당거린다.

1년뒤 학예회 연습을 하던 중 아이들의 장난으로 강당에 화재가 발생한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수하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홍연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수하의 뒤를 따른다.

얼마후 산리를 떠나는 수하의 뒷모습을 보는 홍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린다.

삐걱대는 소리가 정겨운 낡은 풍금, 겨울난로 위에 쌓아놓은 양은도시락,
이제는 찾아 볼 수도 없는 LP레코드, 시끌벅적한 가을운동회 등을 매개로 해
전하는 첫사랑의 기억이 탐스럽고, 때론 저릿하다.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이음새가 유치하지 않고 깔끔하다.

"홍연의 테마"등 조동익의 음악도 따사롭다.

카메라의 시선 또한 깊고 그윽하다.

전도연은 가난했지만 따스했던 그 시절을 더 없이 순수하게 담아냈다.

이병헌의 어눌한 말투와 희디 흰 미소가 정겹고 이미연의 깊은 눈길 연기도
매력있다.

< 김재일 기자 kji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