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이 어느때부터 민족의 성산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학자들은 고려시대에 풍수가 널리 수용되면서 우리 국토가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내렸다는 백두산 중심의 지맥론이 일반화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1402년(태종 2년)에 만든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에는 백두산이 표시되지 않았다.

반면 조선후기인 16세기 이후에 그려진 지도는 백두산이 크게 흰색이나
황금색으로 돋보이게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역사의 흐름에 따른 사회구조 지역구조의 변화가 국토와 자연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실학이 등장하는 조선후기에 오면 국토를 산고 강으로 파악하려 했던 풍조가
심화돼 산중심체계와 강중심 체계로 나뉘어진다.

신경준(1712~1781)은 "산경표"에 조선의 산줄기를 15개의 산맥으로
일목요연하게 표시해 놓았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에 이르는 1개의 대간과 함경도를 관통하는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했다.

정약용은 "대동수경"에 강및 지류의 흐름, 유역의 역사적 사실, 관아 등을
꼼꼼히 기록해 남겼다.

이들은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 안목에서 조망해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려
했다.

두사람의 공통점은 땅위의 인간에 바탕을 둔 인간주의적 자연지리학을
정립시키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제는 1890년대부터 인간을 도외시한 땅속의 지질구조에 따라
산맥을 재분류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분류체계는 일본인이 만든 것이다.

최근 한 민간단체의 탐사결과 "낙동정맥"의 생태계훼손이 위험수위에 달했다
는 보고서가 발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정부의 마구잡이 개발, 밀엽 등으로 산림이 파괴되고 황폐화 돼 간다는
이야기다.

"낙동정맥"이란 백두대산 지맥의 하나로 태백산맥에서 시작해 울진 영해
경주 청도 양산 동래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동쪽의 산준기를 말한다.

한창 동강댐을 건설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때여서인지
잊었던 "낙동정맥"이란 용어가 더 새롭게 들린다.

옛 사람들의 국토와 자연을 거시적 안목으로 파악해 개발계획을 세울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뜻이 담겨있는것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