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왜는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에 있었다. 이 세력이 바다를 건너가
천황가의 주인공이 됐다"

나주 영산강 유역 반남면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있다.

길이 46m, 높이 9m나 되는 덕산리 3호분은 백제 왕실 고분보다 훨씬 크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이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최근 "매장방법이나 옹관규모 출토유물 등을 면밀히 분석할 때
마한이 아니라 일본으로 쫓겨가기 전의 왜 세력이었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씨와 연구실장 이희근씨가 공동저서
"우리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1917년 고분을 처음 발굴한 일제는 한 장짜리 약식 보고서에서 "아마
왜인의 것일 것이다"라고만 얼버무리고 정식 보고서는 발표도 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을 한반도 지배의 근거로 삼았던 그들로서는 굉장한
발견일텐데 왜 그랬을까.

이 고분의 유물이 일본 열도에 있던 "왜"의 한반도 지배에 대한 증거라기
보다 이 지역에 있던 "왜"세력이 바다를 건너가 천황가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위서" "후한서" "삼국사기"등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왜"의
위치를 지금의 나주로 추정했다.

한반도에 있던 "왜"가 5세기 무렵 광개토대왕에게 타격을 입고 지금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이해하면 광개토대왕릉비의 모순도 함께 풀리게
된다.

일본천황가의 뿌리가 기마민족이 아니라 나주에서 건너간 왜세력이라는
결론까지 나온다.

나주 고분군의 주인공과 일본 천황가의 시조를 동시에 추적한 이 대목은
한.일 양국 사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저자들은 "왜가 처음부터 일본 열도에 있었다"는 고정관념이 그동안
역사의 사각지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뿐인가.

우리 고대사에서 "삼국시대"는 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불과 1백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 남부에 걸쳐 부여 가야 등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한국고대사의 모든 체계를 삼국의 틀 속에서 설명하려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그래서 "원삼국시대"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역사용어인 것처럼 쓰이고 있다.

저자들은 당시 삼국 이외의 많은 나라들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를
열국시대나 전국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또 세계 최초와 최고라는 수식어에 집착하는 우리 민족의 헛점을
지적한다.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가"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은 세계사적
사건인가"등이 그것이다.

홍길동과 임꺽정은 의적이 아니라 도둑의 수괴였으며 관리들의 수탈에
반감을 가진 농민들에 의해 "영웅"으로 둔갑했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 들여왔다지만 그당시 목화씨는 반출금지
품목이 아니었다고 한다.

후대의 정치조건과 자손들에 의해 변질된 역사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다.

저자들은 "역사연구가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져왔고 이들이 만든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재야"라는 딱지를 붙여 비하하기 일쑤"였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역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사학계 일부의 폐쇄적 관행에 맞서 박제된 역사를
광장으로 끌어내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만 옳고 다른 학설은 모두 잘못됐다는 식의 논의도
위험하다.

따라서 이들은 이 책을 계기로 다양한 논의와 반론이 활발하게 제기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