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36)씨가 신작 장편 "꽃의 기억"(문학동네)을 펴냈다.

이 소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요?"로 시작해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요?"로 끝난다.

"당신"에서 "우리"로 바뀌는 과정이 화자의 질문이면서 대답이다.

작가는 너나없이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자아회복과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는 길을 제시한다.

주인공 박경진은 일곱살난 딸아이와 사는 화랑 큐레이터.

결혼과 출산 이혼을 거치면서 맥없이 허물어진 그녀는 벌거벗은 채 세상과
맞서 새 질서를 재구축해야 하는 변곡점에 서 있다.

그녀 곁으로 각기 다른 세계를 표상하는 세 남자가 다가온다.

화가인 최성택은 술에 절어 살며 기행을 일삼는 괴팍한 인물.

현실보다 이상 쪽에 가까운 남자다.

설치미술전을 기획중이던 그녀는 최성택의 화실을 찾아갔다가 "유년부터의
상처와 악몽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그림을 보고 놀란다.

그림 속에서 "나 자신을 찢어발기고 싶은 욕망"을 발견한 그녀는 "광포하고
도 격렬한" 섹스를 갖는다.

내면의 휴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이 일탈은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우진석은 자본주의의 환금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동시에 제공하는 보증수표지만 딸을
포기해야 결혼할 수 있는 "문밖의 남자"다.

우연히 그녀 집 소파에 잠든 남자 신지우.

그는 그녀가 출근한 뒤 아이와 아침을 차려먹고 도시락을 챙겨 유치원까지
데려다 준다.

또 비오는 날 커다란 우산을 받치고 아파트 화단에 앉아 아이와 꽃이름
잇기를 하는 "알 수 없는 남자"다.

유학을 앞두고 그림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버렸고 그 여자가 자살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추락한 존재다.

그녀는 "아득히 먼 듯하면서도 숨이 가쁠만큼 가까운" 그에게 "용납되지
않는 그리움과 간절함"을 느낀다.

어느날 그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그가 남긴 노트북 파일 속에서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발견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참된 모습에 눈뜨고 진정으로 소망했던
"나 홀로 서 있는 나의 자리"를 찾는다.

삶의 명암을 선체험한 신지우를 통해 미망의 안개속에서 새로운 성찰의
문을 열고 거듭난 것이다.

이 작품에는 내면의 심지에 상처의 기름을 부어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밀도있게 그려져 있다.

그 상승의 극점에는 소멸함으로써 되살아나는 "상생의 불꽃"이 있다.

나와 타자, 개인과 사회, 존재와 본질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던져주는 "죽비"같은 소설이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