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 '아름다운 세대교체'] '명예퇴진 라응찬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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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도 신한은행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한은행은 저의 모든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18일 오후 1시 40분 신한은행 20층 강당.
라응찬 행장은 24일 주총에서 물러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날 3백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퇴임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퇴임 발표가 끝나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났다.
떠나는 자에 대한 예우 차원만은 아니었다.
신한은행을 불과 17년만에 우량은행으로 우뚝 설 수있도록 해준데 대한
고마움이 배어 있었다.
그는 현직 최장수 은행원이다.
지난 59년3월에 들어간 농업은행경력을 감안하면 딱 40년이 흘렀다.
신한은행에서 최장수 은행장(8년) 기록을 세웠다.
82년 7월 창립 당시 자본금 2백50억원 직원 2백79명 점포 3곳으로 출발했던
신한은행.
현재는 자본금 1조1천6백89억원 직원 4천5백여명 점포수 3백26명 총수신
28조7천6백97억원에 이르고 있다.
다른 시중은행이 50년이상 걸려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신한은행은 단기간
내에 압축성장했던 것이다.
비단 외형뿐만이 아니다.
신한은행은 지난 91년부터 6년 연속으로 은행감독원의 은행경영평가에서
최우수등급을 받았다.
직원들은 그 공을 라 행장에게 돌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라 행장은 "파벌과 청탁"을 배격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하다.
은행 창립멤버인 라행장(당시 상무)은 82년 창립 첫해부터 "파벌 조성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 파벌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또 인사 및 대출청탁 등 외압에도 맞서 왔다.
과거 라 행장이 대구은행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당시 행장으로 모셨던
김준성 전 부총리의 인사청탁까지 거절했다는 후문은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일화다.
관치와 비리로 점철된 국내 은행권에서 "희귀종"이었던 셈이다.
그는 요즘 김정태 행장이 외압 배격에 나서고 있는걸 보고 "젊은 은행장이
참 잘하고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 59년3월 농업은행에 입행,은행에 몸담으며 입지전적
인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어렸을적 꿈은 의사였다고 한다.
몸이 몹시 아파 심하게 앓다가 인근병원에서 주사 한대 맞고 거뜬히 낫게돼
의사를 동경하게 됐다는게 라 행장의 회고.
비록 의사는 못됐어도 그가 국내 금융을 "치료"하는 일은 했던 것 같다고
금융관계자들은 평하고 있다.
최근 3-4년간 대형은행을 쫓아가기 위해 다소 무리한 확장정책을 펴느라
부실이 늘었지만 나 행장 만큼 은행을 건실하게 꾸려온 사람도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국내 은행권 최초로 3연임된 은행장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자리에 연연해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껏 사표를 세번이나 냈다.
3연임되기 직전(97년2월), 기아사태가 터진 후(97년7월), 그리고 이번.
주변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늘 서랍을 비운채 경영을 했다고 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마음으로 경영하기 위해서.
그는 퇴임발표에서도 "때를 정확히 알고 자신의 역할에 선을 그을 줄 아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 이성태 기자 ste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19일자 ).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18일 오후 1시 40분 신한은행 20층 강당.
라응찬 행장은 24일 주총에서 물러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날 3백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퇴임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퇴임 발표가 끝나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났다.
떠나는 자에 대한 예우 차원만은 아니었다.
신한은행을 불과 17년만에 우량은행으로 우뚝 설 수있도록 해준데 대한
고마움이 배어 있었다.
그는 현직 최장수 은행원이다.
지난 59년3월에 들어간 농업은행경력을 감안하면 딱 40년이 흘렀다.
신한은행에서 최장수 은행장(8년) 기록을 세웠다.
82년 7월 창립 당시 자본금 2백50억원 직원 2백79명 점포 3곳으로 출발했던
신한은행.
현재는 자본금 1조1천6백89억원 직원 4천5백여명 점포수 3백26명 총수신
28조7천6백97억원에 이르고 있다.
다른 시중은행이 50년이상 걸려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신한은행은 단기간
내에 압축성장했던 것이다.
비단 외형뿐만이 아니다.
신한은행은 지난 91년부터 6년 연속으로 은행감독원의 은행경영평가에서
최우수등급을 받았다.
직원들은 그 공을 라 행장에게 돌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라 행장은 "파벌과 청탁"을 배격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하다.
은행 창립멤버인 라행장(당시 상무)은 82년 창립 첫해부터 "파벌 조성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 파벌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또 인사 및 대출청탁 등 외압에도 맞서 왔다.
과거 라 행장이 대구은행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당시 행장으로 모셨던
김준성 전 부총리의 인사청탁까지 거절했다는 후문은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
일화다.
관치와 비리로 점철된 국내 은행권에서 "희귀종"이었던 셈이다.
그는 요즘 김정태 행장이 외압 배격에 나서고 있는걸 보고 "젊은 은행장이
참 잘하고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 59년3월 농업은행에 입행,은행에 몸담으며 입지전적
인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어렸을적 꿈은 의사였다고 한다.
몸이 몹시 아파 심하게 앓다가 인근병원에서 주사 한대 맞고 거뜬히 낫게돼
의사를 동경하게 됐다는게 라 행장의 회고.
비록 의사는 못됐어도 그가 국내 금융을 "치료"하는 일은 했던 것 같다고
금융관계자들은 평하고 있다.
최근 3-4년간 대형은행을 쫓아가기 위해 다소 무리한 확장정책을 펴느라
부실이 늘었지만 나 행장 만큼 은행을 건실하게 꾸려온 사람도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국내 은행권 최초로 3연임된 은행장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자리에 연연해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껏 사표를 세번이나 냈다.
3연임되기 직전(97년2월), 기아사태가 터진 후(97년7월), 그리고 이번.
주변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늘 서랍을 비운채 경영을 했다고 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마음으로 경영하기 위해서.
그는 퇴임발표에서도 "때를 정확히 알고 자신의 역할에 선을 그을 줄 아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 이성태 기자 ste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