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이다.

세월을 헤아려 천을 세는 이른바 두 번째 마지막 해다.

그래서 "세기말"이라든가 "종말론"이라는 어휘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보면 캘린더가 없던 시대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한 문화속에서는 인간이 연대기에 얽매여 살았을 것 같지 않다.

퇴색하는 삶은 자연이지 그것을 굳이 "헤아려진 시간의 단위"로 묘사했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을 숫자화하는 일은 인간의 의식속에 본연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역은 다만 삶의 편의를 위한 유용한 도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역이 이제는 인간의 의식을 근원적으로 제어하고 있다.

토막낸 세월의 열을 헤아리고 백을 말하며 천에 놀라면서 그때마다 이른바
"시간의식"으로 자기 삶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의식"이란 자연으로부터 일탈한 인간이 어색하게 자기를
정당화한 기반적 이념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20세기"나 "종말론"이 모두 그리스도교라는 특정한 종교의 문화
풍토에서 형성된 것임을 유념하면, 그러한 개념들을 가지고 요란을 떠는
일이 얼마나 낯선 "흉내내기"인지 알만하다.

그러므로 20세기가 끝나는 때이기 때문에 진정한 새로운 세기가 시작돼야
한다든가, 지금은 두 천년을 마감하는 종말의 때라든가 하는 것은 인류사의
맥락에서 볼 때 그리 보편적인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의 문화를 간과할 수도 없고, 온 세계가 거의 공유
하고 있는 서력에 의한 세월 토막내기를 무시할 수도 없다.

우리도 이미 그 문화와 접목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는 바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예 세기말이나 종말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해 지니는 일이
훨씬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은 역의 문화 이전에,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종말을 주장하기 이전부터, "지금 여기"의 세상이 한꺼번에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가 인류의 경험안에
"언제 어디에서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승인하는 일이다.

삶이 억울하고 분하고 한맺힘이 더할수록 이러한 기대는 그만큼 더 간절
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지개벽"이 그것이다.

"하늘과 땅이 맷돌짝 같이 딱 들러붙어 세상을 싹싹 갈아버리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연대기와 연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의 자리가 이루는 도덕적인 상황과 관계된 개념이다.

따라서 천지개벽은 원론적으로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연대기에서 비롯하는 새로운 세기도 아니고,
거기에서 유추되는 종말도 아니다.

"끝나고 되비롯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지어다!"하고 바라는 "종말의식"의
현존, 그리고 그것 자체의 사회화 또는 문화화 현상이다.

그것은 낡은 것을 청산하고 새것을 펼치려는 건강한 꿈꾸기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기말과 종말을 근거로 한 온갖 참언이 회자되고 있다면 그것은
불안한 조짐이다.

그것은 삶의 현실이 삶답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채 다만 연대기적인 세기
말과 종말을 너나 없이 읊조리고 있을 뿐, 그러한 현상의 진정한 동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우리의 "다스림"이라는 커다란 틀이 이처럼 처절하게
절망스럽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세기말이나 종말의식은 연대기가 낳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박한 실존적 자의식이 드러내는 절규인데 특정한 연대기의 마디
에서 더 두드러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두 천년을 빙자한 세기말이나 종말을 운위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
계기에서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일은 종말을 회구하는 자의식의 현존에 대한
도덕적 감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종말이 두려우면서도 그것을 재촉하는 자학적인 종말의식을 창조적인 동력
으로 다듬기 위한 참회와 새로운 탄생을 확인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종말의식이고, 세기말의 윤리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