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영화배우 문성근씨를 스크린에서 자주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는 카메라앞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는, 여전히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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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99년엔 배우이기보다는 영화제작자로서, 또 영화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문화운동가로서의 그를 자주 보게 될 전망이다.

이같은 변화는 지난해 문씨의 분주했던 행적을 지켜 본 사람에겐 어느정도
예상됐던 일이다.

늦은 밤의 충무로포럼이나 스크린쿼터 사수대회가 열리던 한낮의 광화문거리
에서 느릿느릿하지만 진지하게 "한국영화에의 열정"을 토해내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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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배우 문성근을 "스크린"에서 "현실공간"으로 이끌어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올해는 나에게 제3의 인생이 시작되는 해"라고
대답했다.

대학(서강대 무역학과) 졸업후 한라건설에 입사,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을
했던게 첫번째라면 80년대초 연극무대로 돌아온 후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자
로, 또 TV시사프로그램의 명 사회자로 숨가쁘게 달려온게 두번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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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가 꿈꾸는 세번째 인생은 무엇인가.

"지난해 스크린쿼터 집회때 누군가 "한국영화를 잘 만들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화가 났습니다. 할리우드란 독점기업이 배급력을
장악한 상황에선 작품의 질이 문제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곧 "나는 영화발전
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문성근은 이후 명계남 이창동 유인택 등 동료영화인들과 뜻을 모아
유니코리아란 투자전문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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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극 TV프로그램 등 문화예술물을 제작 또는 투자하고 연기자교육과
시나리오발굴까지 해내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업체이다.

운영자금 30억원은 대학 동기인 염태순 (주)가나안 대표가 쾌척했다.

이달말 법인 등록을 할 예정이다.

"대기업이나 금융사는 작품 하나마다 수익을 내려하니 영화의 다양성이나
실험성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섯작품씩 하나로 묶어 손익을 따지는
등 장기적인 안목에서 영화제작에 나서려 합니다. 그러나 판에 박힌 모범답안
같은 작품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가 또 역점을 두는 것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영화관련법의 정비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계획이다.

"이러다 국회로 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부친(문익환 목사)을
떠올렸다.

"아버님의 일생을 보며 정치가는 종교인처럼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그런 그릇은 못됩니다. 다만 인생관이 "위선
일지라도 해야될 일은 하겠다"는 적극적인 방향으로 바뀐거지요"

어느새 40대 중반.

"이젠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그는 "언젠가는 "샐러리맨의 죽음"처럼
직장인의 애환을 혼신으로 연기해보고 싶다"고 배우로서의 희망도 밝혔다.

< 이영훈 기자 bria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