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천년께 였다.
슈메르인의 증류주제조법은 서쪽으로 지중해를 따라 전파되다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위스키 브랜디가 됐고 동쪽으로는 멀리 남쪽으로 우회
해 인도를 거쳐 뒤늦게 중국에 전해졌다.
몽골 증류주의 하나인 소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일본 정복을 꾀하며 한반도에 진출했던 고려 충렬왕(1275~1308)
때였다.
그의 본부가 개성에 있었고 병참기지는 안동 제주도가 전진기지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이 지역의 소주가 유명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소주는 제주도의 조랑말처럼 몽골군이 남긴 유산인 셈이다.
또 아랍어로 "아락"인 소주를 만주어로는 "알키", 평북에서는 "아랑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 불렀다는 것으로 미루어 소주는 아라비아 만주
원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술이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소주는 처음 왕이나 귀족들의 약으로나 쓰여 작은 술잔을 "소줏잔"이라
불렀다지만 여말선초에 오면 이 술은 꽤 널리 퍼진다.
조선시대는 곡식이 귀한때여서 열사람이 먹을 곡식을 한사람이 마셔치운다고
금주령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고 서민들이 엄두도 못내는 비싼 술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추운 지방인 북쪽은 물론 남쪽에도 소주를 빚는 집들
이 많았다.
서울에도 마포 공덕동에 소주 만드는 집이 말집해 있었다는 기록은 이미
소주가 대중화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70여년동안 우리나라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해온 "두꺼비"상표의 진로소주가
텃세 심하고 까다로운 일본에 진출한지 20년만에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다.
일본인 10명중 7명이 진로소주를 알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놀랍다.
우리가 일본에 전해준 된장 김치까지 세계시장에서 일본에 뒤지는 판에
재산을 번창하게 하고 부귀영화가 떠나지 않도록 지켜준다는 영물 "두꺼비"
소식은 IMF한파속 섣달 그믐날 추위를 훈훈하게 녹여주는 것만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