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내년이면 몇살이 되지?"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나는 곧잘 아내 나이를 묻곤 한다.

그 물음은 바로 내 나이를 헤아려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내 나이는 아내 나이에다 두 살만 보태면 된다.

사람들은 보통은 나이를 잊고 지낸다.

아니 나이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듯하다.

또 나처럼 아내에게 물어보면 곧 알 수 있고, 아내가 아니더라도 주위에
나이를 가늠할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굳이 머리 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아내는 나이를 하나, 둘 먹는 것이 아니라 다섯, 열 이렇게 먹고 사는 것
같다.

나이를 물을 때마다 한꺼번에 나이를 꿀꺽 삼키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 아내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조그만 아내가 나이를 올차게 삼키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공자님은 남아가 학문에 뜻을 두어 십오세가 되면 학문의 경지에 들어가고,
삼십에는 땅 위에 우뚝 서서 자립하며, 사십이 되면 사물에 미혹됨이 없고,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아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보면 인간의 수명을 백이십세로 보고 있다.

이 수치로 볼 때 오십은 절반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이 오십까지 살기가 가장 힘든 고개가 아닌가 싶다.

어렵사리 올라온 고개 위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내리막길로 빠끔히
보이는 것 같은, 살아 갈 날들을 바라보게 되는 나이가 오십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이미 오십이 지난지 오래, 이제 육십 고개를 바라보고 있다.

"육십이순"이라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순조롭게 이해되는 나이라고 하는데
들리는 소리마다 무리한 소리로 들리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칠십에는 마음을 따라도 윤리 도덕을 넘는 법이 없고 규칙에 어긋남
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될는지..

나이 들고 늙는 일만큼 불쾌한 일은 없다.

아니 용서할 수 없다.

젊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가!

이제 낼 모레면 싫든 좋든 한 살을 더 보태야 한다.

사양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일, 공자님 말씀대로 그 나이에 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될 것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