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이후의 장면 정권과 5.16 초창기에 이르는 격동기 동안 민간 경제계는
한국경제협의회를 중심으로 경제발전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키워왔다.
이는 선각 경제인들의 "집단적 예지"의 소산이었으며 우리 경제발전사에도
확실히 기록돼야 한다.
특히 수출주도와 해외협력을 골자로 한 60~70년대 고도성장 구상은 한국
경제협의회가 만든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 외자유치교섭단을 보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민간 경제계
는 이번에는 일본과의 교섭을 시도한다.
사실 일본과의 교섭은 일찍부터 민간의 몫이었다.
이미 제2공화국 시절 장면 정부와 한국경제협의회 회장단과의 국가경제전략
회의(61년3월24일)에서 해외협력에 관한한 "미국은 정부가, 일본은 협의회"
가 각각 분담키로 합의한 바 있었다.
한.일국교와 경협 문제를 민간 경제계가 맡기로 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우선 45~60년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일관계는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이 대통령이 철저히 반일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부는 장면 총리가 미국에서 공부한 탓에 일본과의 인맥이 거의
없었다.
정치권에 비해 경제계는 교육 배경이나 사업상 이유 등으로 일제강점기간
부터 일본인들과 오랜 연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과의 경제협력 문제는 민간 경제인들이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과의 교섭과 관련해선 생각나는 일들이 많다.
우선 민간경제계가 쌓아놓은 인맥이 많은 도움이 됐던 기억이다.
5.16 군사쿠데타 6개월 후인 61년 11월 한일회담 재개를 위해 방한한 일본
측 수석대표 스기 미치스케씨만해도 한국의 경성방직(현 경방)과의 오랜
거래선인 일본 야야기상점의 전무를 지낸 이였다.
야야기상점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도적 사상가였던 요시다와 인연있는
회사다.
기시 사토 등 일본의 전 총리들은 요시다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출신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스기씨는 기시, 사토 전총리의 큰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이런 유력 인사들과 민간 경제계는 오랜 친분을 쌓아온 것이다.
65년 한일 민간경제협력 협의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스기씨가 김용완 당시
한국경제인협회장(경방회장)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적잖게 놀랐었다.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 핵심과제였던 대일청구권 액수문제도 그 물고를
튼 것은 김용주(현 경총 김창성회장 부친)씨 등 민간경제지도자들이었다.
70년대초 김용완 회장과 당시 경총회장을 맡고 있던 김용주씨, 김봉재
중소기업협동중앙회장 등이 함께 한 술자리로 기억한다.
김용주 회장은 불쑥 "5.16이 몇달만 늦었어도 대일 청구권 교섭은 훨씬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김봉재 회장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 엷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김용완 회장도 묵묵부답이어서 무슨 얘긴지 몹씨 궁금했다.
대일교섭과 김용주, 김봉재 회장의 사연은 이러했다.
민주장 정권시절인 61년 4월말경, 일본 집권당 국회의원 일행(8명)이 한국
에 왔다.
단장에 노다우이치, 부단장에 다나카가구에이 등 대신급에 속하는 거물들
이었다.
이세기 아시아국장, 지금도 필자와 친교가 있는 마에다 동북아과장 등
외무성 관리들이 수행했다.
이들의 방한 목적은 결렬된 한.일회담 개최 협의를 재개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참의원 원내총무였던 김용주씨가 영접위원장을 맡았다.
일본 국회의원 일행은 6일간 머물면서 판문점 38선 등을 시찰하고 한국의
대공방위가 일본에 직결되고 있음을 직접 보았다.
한편 해방전에 이세기 아세아국장과 북경에서 동료외교관으로 같이 근무한
바 있는 한통숙 참의원 의원을 통해 대일청구권 액수가 최저 6억달러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일본 외무성의 분위기를 탐지할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장면 총리는 이를 조속히 추진키 위해 5월 23일 한국 국회대표
단을 파견키로 일본측과 합의했다.
이때 단장은 김용주 원내총무, 8명의 대표 중에 김봉재 이재형(후에 국회
의장)씨 등도 끼어있었다.
그러나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5.16이 터져버렸다.
다시 한국경제인협회의 대일교섭 얘기로 돌아오자.
이병철 회장은 62년 5월26일 밴프리트 단장 등 미 실업인투자단을 보낸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일본경제사절단 유치 작업에 착수했다.
7월께 일본 게이단렌을 방문, 회장단 초청 문제를 협의키로 일정도 잡았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군사정부는 6월9일 "긴급 통화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외자유치에는 정치와 경제의 안정이 절대 필수적이다.
경제가 요동치고 민심 불안이 얼마나 갈지 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군사정부라도 경제를 너무나 모르는 난폭한 조치였다.
그러나 경제인협회 수뇌부는 이럴 때 일수록 경제계만이라도 합리성과
연속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22일에는 이런 뜻을 담아 경제계 의견도 정부에 제출했다.
다행히 군사정부는 7월13일 예금동결을 해제하는 등 보완조치를 취했다.
이 회장은 계획대로 7월에 일본 게이단렌을 찾았다.
우에무라 회장 등과 만나 9월에는 일본경제인들이 방한키로 합의했다.
60년대 한.일 교류의 길을 튼 데는 민간경제인들의 공이 컸다고 하겠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