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공업단지 기공 ]

한국경제인협회가 62년 1월 5일 작성해 11일 이사회 결의를 거쳐 최고회의에
제출한 "종합공업지대 창설에 관한 제의서"를 살펴보자.

제의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해 분투노력하시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각하의 노고에
삼가 감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오늘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제1차 연도에 즈음하여 낙후된 공업경제를
비약적으로 현대화하고 특히 전략부문인 기간산업과 그 관련 산업을 일거에
선진국 공업 수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는 새로운 공업도시를 신설토록
하여 주심을 바라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관견을 품신하오니 획기적인 영단을
내려주시옵기를 바라나이다"

건의서의 형식이고 한껏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민간 경제계의 비전과 결의가
느껴지는 언사들이 적지 않았다.

제의서는 공업도시 신설의 의의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조속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약적인 방법으로 부의
창조를 촉구해야 하는데 이에는 선진국의 최첨단 기간산업체제를 일거에
이식하는 역사적인 과단이 필요합니다.

즉 기존 시설이나 기존 관념 및 방식에 구애됨이 없이 컴퓨터 등 기술혁신을
수반하는 최신 공업모형을 그대로 전수해 이른바 "황금의 공업도시"를 건설
하여야만 국민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거족적인
총력을 경제전에 집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약적인 방법" "국민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경제전에 총력 집중" 운운은 이 회고록 첫회에 소개한
61년 3월24일 장면 내각 중진들과 한국경제협의회 회장단의 심야회의와
맞닿아있다.

그때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배고픈 민중은 특히 격변기에는 집권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빵을 당장 줄 수 없으면 허상의 빵, 꿈이라는 희망이라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비정한 교훈이다.

박정희는 경제에는 무식했으나 이 정치의 요체는 체득한 듯 했다.

당시 경제인협회 사무국은 "공업입지"의 전문가인 알프레드 웨버(Alfred
Weber)의 "입지인자" 집적(agglomeration)의 이익" 등 전문적인 공업입지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울산공업지역을 무엇으로 호칭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업도시" "공업지대" "공업지역" 그리고 "공업센터" 등으로
명칭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신공업도시의 입지조건에 대해선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본 협회가 실측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공업지리상 경남 울산읍 인근지 일대가
공업센터 건설에 가장 적합하다고 사료되오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울산지역은 최소한 1천만평의 공장건설 부지를 확보할 수 있음
나)항만의 천혜조건으로 3만t급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고, 부산 포항과
연결하면 대선박단의 출입조절이 가능함
다)육운의 경우도 부산 경주 대구 원주 등을 연결하는 철도와 육로가 망라된
사통오달 지역임
라)공업용수로 태화강 및 동천의 유수량과 지하수 개발로 하루 1백만t이
가능함
마)특히 기후가 온화하여 열 관리에 유리하며 부산 마산 등 남해안 일대의
인적 자원 유치도 유망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업센터의 지역구분은 공장지대 주택지대 오락지구 상업지구 행정
지구 및 풍치지구별로 구분한다.

지금 봐도 설득력있는 "우등생의 교과서식 구상"이라고 하겠다.

공장지대에는 1)종합제철공장 1백만평, 1차로 30만t 2)비료공장 50만t에
1차로 25만t 3)정유공장 10만배럴짜리 4)발전량 20만kW 5)종합제철이 가동
되면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해 연관 효과를 노린다.

이밖에 전기기기 섬유 그리고 석유화학 연관 공업으로 폴리프로필렌 에틸렌
등 약 10종의 공장을 건설키로 했다.

이 제의서를 받은 박정희는 특유의 직감으로 이 공업센터 안이야 말로 뒤숭
숭한 민심을 잡을 수 있는 그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해 곧 실무반을 편성해
현지조사를 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체없이 "관민합동의 공장도시 건설 명명과 기공식"을 준비
시킨다.

우선 건설은 뒤로 미루고 기공식부터 해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군사정부의 초조함과 무모하다고할 할 과단성의 합작품이었다.

경제인협회 측도 기민성에 있어서나 결단성에 있어서 절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쯤 되니 자연스럽게 앞에서 정부를 이끄는 형국이 됐다.

경제인협회는 이와 함께 희망하는 기업인들을 알선, 부지 분양 계약을
주선했다.

조상전래의 옥토가 일조에 공장지대로 돌변한다는 소식에 땅주인들은 불안에
떨고 아우성이었다.

이에 협회는 울산읍장과 함께 나서서 이들을 설득 무마노력까지 기울여야
했다.

"선기공 후건설" 이라는 전격적인 관민 추진력으로 거론된지 불과 한달이
못돼 2월3일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불편한지라 서울 귀빈들은 2일 미리 부산과 해운대
방면으로 내려가 하루 묵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울산에 들어섰다.

기공식장엔 소나무 가지로 만든 축문이 섰고 두루마기에 갓쓴 촌부들과
손에 태극기를 든 어린 학생들이 나와 신구가 합쳐진 모습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기공 발파 단추를 누렀다.

울산 한촌 벌판에 5천년 사상 처음으로 공업근대화의 굉음과 함성이 울려
퍼졌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