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학의 구조조정보다 시급한 것..정진홍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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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 서울대 교수. 종교학 >
사실을 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사고현장을 묘사하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나중에는 어느
말이 옳은지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보는 자리와 본 순간과 자기가 겪었던 어떤 사고의 경험과 세상이 일컫는
그 사고에 대한 견해들이 개개인의 사실 묘사에 알게 모르게 작용하기 때문
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 사건의 실상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
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는대로 말하기의 비현실성을 유념하는 사람들은 아예 보는대로
말하기가 실은 정직하고 정확한 것이라는 주장조차 편다.
무릇 하나의 사실에 대한 관심은 이미 그 관심과 더불어 어떤 의도가 전제
되어 비로소 그 사물이 묘사되고 기술되는 객체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주체의 자율성을 한껏 존중해주는 것이 이른바 객관성의 주장
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람살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러 사람들을 할 수 있는 한 크게 포용하는 보편적 인식을
의도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진지함을 담은 태도이다.
따라서 그러한 보편적 인식을 아예 불가능한 것이라는 판단으로 거절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학문이란 이러한 현실의 맥락속에서 바로 그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결집된 문화이다.
학문의 귀함은 바로 그런 속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사실의 논의보다 사실에 대한 입장의 논의가 전제되면서 사실은 아예 논의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사실에서 비롯하는 사실묘사나 그 사실묘사에서 귀결되는 해석이 인식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제된 해석이 묘사를 낳고 그렇게 이루어진
묘사가 사실을 만드는 기이한 인식 내용을 사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규범적으로 제시된 미래상에 근거하여 현재를 서술하는 것은 자칫 자기
기만을 범할 수 있다는 위험이 그리 뚜렷하게 의식되지 않은채 많은 사실들이
일컬어지고 있는 것 같고, 목표지향적 실천의지의 발휘라는 용감한 도덕성에
의한 일의 감행은 자칫 그러한 행위의 당위성을 요청한 현실의 문제를 정직
하게 직면하기 보다 자신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 문제정황을 변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파사가 곧 현정이라는 참으로 소박한 인식을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파사는 힘을 가지고 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도 충분하지만
현정은 그렇지 않다.
힘과는 그 속성이 전혀 다른 지혜와 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파사는 현정의 전제조건일 뿐이지 현정이 파사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아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개혁이 당위적인 상황일수록 우리에게는 용기라는 이름의
힘만이 아니라 이른바 건전한 인식론이 사실묘사와 그로부터 비롯하는 목표
지향적 방법론을 수립하기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하다.
학문의 소임은 바로 그것이다.
그 소임의 수행이 다름아닌 비판적 지성의 몫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지난 몇십년 동안 비판적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도 실은 권력지향적 행태를 끊임없이 견지해온 지성의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그러한 지성들은 다행히 이른바 정권의 지속과 교체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힘으로부터의 보상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지성의 역할도 끝나야 한다.
학문은 힘지향적 레토릭이 아니라 건전한 인식론에 바탕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힘에 대해서도 힘이 아니라 끝내 건전한 인식에
기초한 논의로 대처해야 한다.
세상이 다 변한다면 마땅히 학문의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1일자 ).
사실을 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사고현장을 묘사하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나중에는 어느
말이 옳은지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보는 자리와 본 순간과 자기가 겪었던 어떤 사고의 경험과 세상이 일컫는
그 사고에 대한 견해들이 개개인의 사실 묘사에 알게 모르게 작용하기 때문
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 사건의 실상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
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는대로 말하기의 비현실성을 유념하는 사람들은 아예 보는대로
말하기가 실은 정직하고 정확한 것이라는 주장조차 편다.
무릇 하나의 사실에 대한 관심은 이미 그 관심과 더불어 어떤 의도가 전제
되어 비로소 그 사물이 묘사되고 기술되는 객체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주체의 자율성을 한껏 존중해주는 것이 이른바 객관성의 주장
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람살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러 사람들을 할 수 있는 한 크게 포용하는 보편적 인식을
의도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진지함을 담은 태도이다.
따라서 그러한 보편적 인식을 아예 불가능한 것이라는 판단으로 거절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학문이란 이러한 현실의 맥락속에서 바로 그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결집된 문화이다.
학문의 귀함은 바로 그런 속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사실의 논의보다 사실에 대한 입장의 논의가 전제되면서 사실은 아예 논의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사실에서 비롯하는 사실묘사나 그 사실묘사에서 귀결되는 해석이 인식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제된 해석이 묘사를 낳고 그렇게 이루어진
묘사가 사실을 만드는 기이한 인식 내용을 사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규범적으로 제시된 미래상에 근거하여 현재를 서술하는 것은 자칫 자기
기만을 범할 수 있다는 위험이 그리 뚜렷하게 의식되지 않은채 많은 사실들이
일컬어지고 있는 것 같고, 목표지향적 실천의지의 발휘라는 용감한 도덕성에
의한 일의 감행은 자칫 그러한 행위의 당위성을 요청한 현실의 문제를 정직
하게 직면하기 보다 자신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 문제정황을 변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파사가 곧 현정이라는 참으로 소박한 인식을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파사는 힘을 가지고 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도 충분하지만
현정은 그렇지 않다.
힘과는 그 속성이 전혀 다른 지혜와 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파사는 현정의 전제조건일 뿐이지 현정이 파사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아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개혁이 당위적인 상황일수록 우리에게는 용기라는 이름의
힘만이 아니라 이른바 건전한 인식론이 사실묘사와 그로부터 비롯하는 목표
지향적 방법론을 수립하기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하다.
학문의 소임은 바로 그것이다.
그 소임의 수행이 다름아닌 비판적 지성의 몫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지난 몇십년 동안 비판적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도 실은 권력지향적 행태를 끊임없이 견지해온 지성의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그러한 지성들은 다행히 이른바 정권의 지속과 교체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힘으로부터의 보상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지성의 역할도 끝나야 한다.
학문은 힘지향적 레토릭이 아니라 건전한 인식론에 바탕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힘에 대해서도 힘이 아니라 끝내 건전한 인식에
기초한 논의로 대처해야 한다.
세상이 다 변한다면 마땅히 학문의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