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1327~1405)는 고려 말~조선 전기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씨다.

자초대사라고도 한다.

계월헌.

삼기(섬천군) 출생이라고 되어 있다.

무학과 태조 이성계는 조선이 개국하기 전 운명적인 두 번의 만남을
나눴다.

첫번째는 무학이 그의 스승 나옹대사를 수행하며 함경도 땅을 편력하던
길이었다.

우연히 만난 이성계의 간청을 듣고 그의 부친을 위한 묘자리를 정해주게
된다.

이 묘의 음덕으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두번째는 이성계가 안변땅에서 꾼 꿈의 해몽과 관련해서다.

어떤 노파의 권유에 따라 설봉산 절에 있는 승려에게 해몽을 들으러 갔는데
그가 무학이었다.

신인이 금척을 내려준 것은 반드시 왕이 된다는 소식이라는 해석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개국과정에서 왕사로 책봉되어 도읍의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된다.

한양 도읍이 결정된 후, 삼봉 정도전과 도읍지의 좌향을 결정하는데 있어
일대 신경전을 연출한다.

무학은 동쪽을 바라보는 궁궐을 주장한데 반해 정도전은 고래의 군주들이
남향하여 정사를 주관하였다는 설을 들어 고집을 부렸다.

결국 정도전의 설이 채택되었다.

이에 개탄한 무학은 2백년 후에 나의 말이 헛되지 않음이 입증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의상대사의 산수비기에 적어놓은 도읍을 결정함에 있어 정씨의 말을
들으면 오세가 되지못해 찬탈의 화가 생기며 2백년안에 탕진될 위험이 있다는
말에 유래한다.

태종 형제간의 싸움, 세조의 왕위 찬탈, 임진왜란 등의 화근이 이때부터
싹텄다는 얘기다.

또한 종묘 정문 현판에 창엽문이라는 이름을 지어 남겨놓았다.

이를 한문의 파자로 풀이하면 조선왕조는 28대를 못 넘긴다는 의미가 있다.

창자는 이십팔군이며 엽자는 이십세로 풀이되어 진정한 왕통은 20세까지만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철재 <충남대 언어학과교수/역학연구가 cjseong@hanbat.chungnam.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