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방에 들어서면 우선 벽에 붙어 있는 두장의 사진에 시선이 박힌다.

외국잡지에 난 것을 필름을 받아 B4용지 정도의 크기로 확대한 파리의
머리와 몸통 사진이다.

그 옆으로는 숭숭 갉아먹힌 나뭇잎위를 기어가는 애벌레의 사진이나
다양한 각도에서 갈대밭을 찍은 스냅 사진들이 온 벽을 장식하고 있다.

책장에는 패션잡지가 가득하다.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장 박종서(51) 상무.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수석졸업, 92년 디트로이트모터쇼 최우수 컨셉트카
수상 등 화려한 경력에 빛나는 국내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다.

그러나 경기도 남양 현대자동차기술연구소내 10평 남짓한 그의 집무실에서는
이상하게도 자동차보다는 곤충 사진이 더 많았다.

"자동차만 들여다 봐선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없어요.

해답은 자연속에 있습니다.

딱정벌레의 고운 빛을 어떻게 표현하고 듬성듬성 나있는 촉수 몇개로
부족한 것이 없는 파리 머리의 완벽한 단순함을 어떻게 흉내 내겠습니까"

박 상무가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된것도 일종의 자연의
섭리다.

전자업체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지난 79년 일본의 자동차 전문잡지인
"카 스타일링"에 기고한 글이 현대자동차 디자인팀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된
것.

우연처럼 보이지만 평소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에게는
예정된 운명이었다.

회사는 고맙게도 이듬해 세계 최고의 카 디자인 스쿨인 RCA에 유학을 보내
줬고 그는 "수석졸업"으로 보답했다.

오일쇼크의 고통속에서도 회사가 대준 "금쪽"같은 유학비로 열심히 공부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이후의 현대차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엘란트라 스쿠프 쏘나타I~III 그리고 이달초 빛을 본 그랜저 XG에 이르기
까지.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곳이 없겠지만 박 상무에게는 특히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티뷰론.

그의 표현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해 봤고 그동안의 노하우를 총집결시킨
모델"이다.

티뷰론의 컨셉트카 HCD-I은 지난 92년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최우수
컨셉트카로 뽑히면서 세계 자동차 디자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박 상무는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미래를 보는
혜안"이라고 한다.

3~4년의 개발기간을 쏟아 새차가 나온 뒤 4년정도 지나 모델 체인지를
하는만큼 최소한 7~8년 앞은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001년까지 나올 차들은 이미 디자인이 끝나 있습니다.

현재는 그 뒤에 내놓을 차들을 준비하고 있지요.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복잡한 디자인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단순한 디자인에 멋을 부려야 하니 점점 어려워져요"

< 윤성민 기자 smy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