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24)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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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재건을 위한 제안 ]]
61년 6월 하순 어느날.
최고회의 유원식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용완 경방사장,
전백보 천우사사장, 정인욱 강원산업사장 등이 최고회의에 나타났다.
곧이어 유원식과 함께 박정희 최고회의부의장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박정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견을 듣기 위해 뵙자고
한 것입니다"
검은 안경에 깡마른 체격,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매우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박정희는 이후에도 그랬지만 기업인들을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기업인들도 국가최고 지도자라고 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당당했다.
소신있는 몸가짐에 나는 늘 강한 인상을 받아왔다.
이날도 그랬던 모양이다.
나중에 이들 세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날의 대화내용을 다시
꾸며본다.
박정희는 주로 묻고 듣는 편이었다.
"순서없이 어느 분이나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김용완 사장이 전택보 사장에게 먼저 하라고 눈짓을 했다.
전 사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5월 하순 정회된 한국경제협의회가 최고회의에 건의한 내용을 앞으로
경제운용에 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학계나 언론에서는 한국경제 앞날에 대해 비관하는 경향이 강하나 우리
경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기 계신 두 분과 저는 우리가 자립경제를 능히 이룩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이어진 전 사장의 경험담은 박정희를 솔깃하게 했다.
"47년 홍콩에 갔을 때 얘깁니다.
당시 홍콩에는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든 피난민들이
우글거렸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먹는 홍콩이 몇백만의 피난민에게 일터를 마련하고 활기
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보세가공"을 해서 수백만이 살아가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하면 우리 여건은 잘 운영만 하면 몇갑절 유리하다고 봅니다"
박정희는 보세가공이란 말을 처음 듣는 듯 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계속되는 전 사장의 설명이다.
"홍콩은 작은 섬이라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는 원자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외국에서 수입합니다.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 수출하는게 보세가공입니다.
이를테면 원단을 수입해서 아동복이나 봉제완구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만들어
다시 수출하는 거지요.
홍콩의 부녀자들은 재봉틀 하나를 갖고 4~5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습
니다.
우리 여성들의 봉제기술은 아마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일
겁니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확실히 잡히지 않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내일 별도로 시간을 낼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
니까"
전택보가 이튿날 박정희를 만났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제대로 알기위해 철저히 파고드는 박정희의 기질이 나타나는
듯했다.
전택보 사장에 이어 김용완 사장의 제언이 계속됐다.
"무엇보다 정국을 빨리 안정시켜야 합니다.
정국이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도 불안하고 경제인들은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된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 사정이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미가 등 농산물가격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매력이 생기고 내수시장도 확대돼 경기가 회복되지요.
그리고 대학이 너무 많습니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전문학교로 개편해 경제건설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완은 조심스럽게 소위 "부정축재자" 석방
문제를 제기했다.
"그 사람들을 하루 빨리 풀어줘 경제건설에 참여시키십시요.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게 중에는 잘못을 저지른 자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상황에
못이겨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자세는 이제 진지함을 넘어 긴장감마져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탓이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인욱 사장이 소견을 폈다.
그는 5.16 군사정부로부터 "기획위원" 제1호로 위촉받은 인물.젊은 장교들이
태백산오지에서 수도승 같은 생활속에서 매년 50t 이상 무연탄 증산을 이룩
하는 정 사장의 모습에 매료돼 그를 제1호 기획위원으로 추천했었다.
"우리 힘으로 경제재건은 물론 급속한 공업화도 이룩할 수 있고 이북을
능히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지난 20여년간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30m
이하 심층에 있는 지하자원을 탐사한 일이 없습니다.
무슨 광물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를 정밀 탐사하고 실업자에 일터를 주면 경제발전에 큰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재력과 능력있는 경제인들에게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심을 갖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근로자들의 근면성도 큰 자원입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이날 모임은 큰 의미가 있었다.
군인으로서 전란과 사회풍랑을 거쳐온 그는 이날 전혀 새로운 유형의 인간
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기업가들에게서 소위 권력이나 힘에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느낀 듯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8일자 ).
61년 6월 하순 어느날.
최고회의 유원식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용완 경방사장,
전백보 천우사사장, 정인욱 강원산업사장 등이 최고회의에 나타났다.
곧이어 유원식과 함께 박정희 최고회의부의장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박정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견을 듣기 위해 뵙자고
한 것입니다"
검은 안경에 깡마른 체격,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매우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박정희는 이후에도 그랬지만 기업인들을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기업인들도 국가최고 지도자라고 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당당했다.
소신있는 몸가짐에 나는 늘 강한 인상을 받아왔다.
이날도 그랬던 모양이다.
나중에 이들 세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날의 대화내용을 다시
꾸며본다.
박정희는 주로 묻고 듣는 편이었다.
"순서없이 어느 분이나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김용완 사장이 전택보 사장에게 먼저 하라고 눈짓을 했다.
전 사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5월 하순 정회된 한국경제협의회가 최고회의에 건의한 내용을 앞으로
경제운용에 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학계나 언론에서는 한국경제 앞날에 대해 비관하는 경향이 강하나 우리
경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기 계신 두 분과 저는 우리가 자립경제를 능히 이룩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이어진 전 사장의 경험담은 박정희를 솔깃하게 했다.
"47년 홍콩에 갔을 때 얘깁니다.
당시 홍콩에는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든 피난민들이
우글거렸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먹는 홍콩이 몇백만의 피난민에게 일터를 마련하고 활기
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보세가공"을 해서 수백만이 살아가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하면 우리 여건은 잘 운영만 하면 몇갑절 유리하다고 봅니다"
박정희는 보세가공이란 말을 처음 듣는 듯 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계속되는 전 사장의 설명이다.
"홍콩은 작은 섬이라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는 원자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외국에서 수입합니다.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 수출하는게 보세가공입니다.
이를테면 원단을 수입해서 아동복이나 봉제완구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만들어
다시 수출하는 거지요.
홍콩의 부녀자들은 재봉틀 하나를 갖고 4~5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습
니다.
우리 여성들의 봉제기술은 아마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일
겁니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확실히 잡히지 않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내일 별도로 시간을 낼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
니까"
전택보가 이튿날 박정희를 만났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제대로 알기위해 철저히 파고드는 박정희의 기질이 나타나는
듯했다.
전택보 사장에 이어 김용완 사장의 제언이 계속됐다.
"무엇보다 정국을 빨리 안정시켜야 합니다.
정국이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도 불안하고 경제인들은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된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 사정이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미가 등 농산물가격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매력이 생기고 내수시장도 확대돼 경기가 회복되지요.
그리고 대학이 너무 많습니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전문학교로 개편해 경제건설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완은 조심스럽게 소위 "부정축재자" 석방
문제를 제기했다.
"그 사람들을 하루 빨리 풀어줘 경제건설에 참여시키십시요.
기업인이란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게 중에는 잘못을 저지른 자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상황에
못이겨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자세는 이제 진지함을 넘어 긴장감마져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탓이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인욱 사장이 소견을 폈다.
그는 5.16 군사정부로부터 "기획위원" 제1호로 위촉받은 인물.젊은 장교들이
태백산오지에서 수도승 같은 생활속에서 매년 50t 이상 무연탄 증산을 이룩
하는 정 사장의 모습에 매료돼 그를 제1호 기획위원으로 추천했었다.
"우리 힘으로 경제재건은 물론 급속한 공업화도 이룩할 수 있고 이북을
능히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지난 20여년간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30m
이하 심층에 있는 지하자원을 탐사한 일이 없습니다.
무슨 광물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를 정밀 탐사하고 실업자에 일터를 주면 경제발전에 큰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재력과 능력있는 경제인들에게 태백산종합개발에 관심을 갖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근로자들의 근면성도 큰 자원입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이날 모임은 큰 의미가 있었다.
군인으로서 전란과 사회풍랑을 거쳐온 그는 이날 전혀 새로운 유형의 인간
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기업가들에게서 소위 권력이나 힘에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느낀 듯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