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문학사에서 청록파가 차지하는 비중은 우뚝 솟은 산처럼 높다.

일제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대뷔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은
1946년 공동사화집 "청록집"을 펴냈다.

좌익 문인들의 생경하고 딱딱한 구호시의 홍수속에 나온 세 사람의 자연을
노래한 순수 서정시는 해방시단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당시 민족진영 문단의 최고 논객이었던 김동리는 "청록집은 한국현대시단
에서 처음 이루어진 자연의 발견"이라고 했다.

또 정지용 김영랑 서정주 유치환 등의 장점을 수용하고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단의 극찬도 받았다.

좌파문인들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민족진영이 내세운것은 민족 전통 역사
였지만 청록파 시인들은 이것을 향토정서 풍물 자연으로 대체해 말솜씨와
기법으로 시속에 용해시켜 놓았다.

"청록집"은 한국시단의 큰 성과였다.

청록파 마지막 시인 박두진이 16일 세상을 떠났다.

박두진의 시는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박목월, 민족정서의 향수를 노래한
조지훈의 시와는 좀 다르다.

두 시인이 동양적이고 현실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데 대해
박두진은 서구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요소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그는 자신의 시적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그
다음 신에게로 확대시켜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시는 그에게 "신의 말씀"같은 것이었다.

"시는 자유 구원 사랑 평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시가 자유의 추구를 포기
하거나 유보해서는 안된다"고 81년 연세대 정년퇴직 고별강연에서 외친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초년 한때는 머슴살이도 했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도 대학강의를 26년간
이나 했다.

만년에는 수석은 "언어없는 시"라며 수석을 노래한 시를 즐겨 썼다.

그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자연 인간 신을 가르쳐 준 시인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아침해의 이미지가 원용돼있다고 한다.

해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해야 솟아라..."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