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돌지 않는다.

안돌아도 너무 안돈다.

8월 중순부터 정부가 돈을 푸는 조치를 잇따라 내놓았지만 신용경색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금융기관들도 9월부터 지원자금을 특별 배정하고 대출금리를 인하했지만
기업들에 흘러 들어가는 자금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퇴출은행 거래기업들은 오히려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지역 기계업체인 S사.

이 회사는 경기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아 산업은행으로부터 7억원의 대출을
받아 썼다.

그러나 경기은행이 퇴출되고나서부터 산업은행으로부터 상환압력을 받고
있다.

한미은행이 경기은행의 지급보증을 믿을수 없다고 선언한 탓이다.

이렇게 퇴출은행 거래기업은 신규대출은 커녕 기존 대출의 만기연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새 담보를 넣고 돈을 빌리려해도 넣을 담보가 없다.

담보물건은 모두 퇴출은행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묶인 담보는 풀어주지 않고 대출금은 당장 갚으라니 곤경에 처할수 밖에.

이뿐만 아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무역금융도 비정상이다.

신생 무역업체들은 수출주문을 받고도 과거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용보증기금등으로부터 외면당한다.

피혁업체인 H사는 최근 일본으로부터 가방등 잡화류 1백만달러어치의
수출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내국신용장(로컬L/C)을 개설하지 못했다.

이미 담보를 제공하고 무역금융을 활용해온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은행이 추가담보를 요구하거나 한도를 줄이기 일쑤여서 신규대출은
"그림의 떡"이다.

무역업체인 D사는 수출환어음(DA)을 제때 할인받지 못해 자금운용에 애를
먹고 있다.

수출환어음 매입시 1백% 위험자산으로 분류된다는 이유로 은행들이 문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각종 정책을 통해 돈을 풀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8월중순 중소기업 특별자금 6조원을 올 10월까지 앞당겨
지원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은행도 9월초 총액대출한도를 2조원 늘리고 금리도 현행 5%에서 3%로
낮췄다.

금융기관들도 9월부터 상업어음 할인금리등 각종 금리를 낮추고 있다.

하나은행의 경우 중소기업에 5억원이상의 대출을 유치하면 20만원의 상금을
지점운영비로 지원하는 등 유인책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자금은 은행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각종 조치들이 나온 9월에도 지난 7일까지 예금은행 대출은 오히려
5천5백37억원이나 줄었다.

한국은행 박철 부총재보는 "통화공급을 늘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시중엔
자금이 풍부하게 있다.

문제는 중소기업에 자금이 돌아가지 않는 신용경색"이라고 말했다.

박 부총재보가 말하는 시중은 그러니까 "시중"이 아니다.

시중은행일 뿐이다.

신용경색 현상은 은행 일선 영업점에서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시중은행 여신기획부장은 "행장과 임원들이 매일 2개 지점씩 방문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일선 지점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은행밖으로 나가는 파이프라인이 막힌 이유는 뭘까.

대한 한국등 2개 보증보험회사의 보증기능 상실을 한 예로 들수 있다.

자산디플레로 담보가치가 하락한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은행직원들에게 있다.

은행원들의 보신주의가 파이프를 막고 있다.

보신주의는 감원과 깊게 연관돼 있다.

은행들은 올해안에 직원을 대폭 줄여야 한다.

6대 시중은행에서만 1만2천여명을 줄일 계획이다.

잘못 대출해줬다가 해당 기업이 부도라도 나면 "해고 1순위"가 되고
퇴직금을 날려버리는 신세가 된다는 부담감이 신용경색의 최대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전에는 추석을 앞두고는 시중자금사정이 넉넉한 편이었다.

올해는 영 딴판이다.

이번 추석에는 여느때보다 한계상태에 몰리는 기업들이 많을 것 같다.

< 정태웅 기자 reda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