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였다.

고려 성종15년(996년)에 처음 철전이 만들어졌다.

숙종 때는 은병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보조화폐로 해동통보를 만들었다.

은병은 간혹 사용됐지만 동전은 조선 전기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와서야 숙종때인 1678년에 나온 상평통보가 민간에까지 파고
들어 전국적으로 유통된다.

상업발달의 결과로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다.

상평통보는 어영청 경희궁안 창덕궁뒤 등 중앙과 지방 각 기관에서
마구잡이로 주조돼 위조동전이 유통되는 혼란을 빚었다.

한국조폐공사의 원조라고 해야할 상설조폐기관은 1883년(고종20년) 창덕궁
근처의 민간집을 임대해 설립한 전환국이다.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실무책임자로 임명해 신식화폐주조때 필요한 기기를
독일에서 구입했다.

이 기관은 시험주화만 만들다가 1888년 문을 닫았다.

그뒤 1890년(고종25년) 전환국 관리로 일본에 유학했던 안동수가 대판제동
회사 사장 마쓰다를 끌어들여 일본돈 25만엔을 대부받아 1892년 인천에서
전환국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전환국이권을 둘러 싼 일본인들의 암투는 고종의 노여움을 사게 돼
고종은 차관을 청산하고 운영권을 되찾는다.

전환국은 한때 용산으로 옮겨져 계속됐으나 동학란 갑오경장 등으로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1904년 문을 닫았다.

전환국 13년동안에 주조된 화폐는 7종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화폐는 대부분 일본 대판조폐국에서 주조했다.

한국조폐공사가 설립된 것은 1951년10월1일 전란속 부산에서였다.

재무부 직할인쇄공장에서 인계받은 2백75명의 인원과 낡은 시설을 가지고
개인 크레용공장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은행권 여권 국채 목표 우표 수입인지는 물론 기념주화 메달 훈장
토큰까지 만든다.

외국의 주화도 만들어 수출했다.

천 경산 부여조폐창에서 3천여명의 직원이 매년 2천5백여종에 달하는 특수
인쇄물과 금속제품을 주조해 공급한다.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조폐공사의 직장폐쇄로 조업중단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중요한 인쇄물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큰일이다.

또다시 외국에서 돈이나 우표를 찍어 오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