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호 < 서강대 교수. 경영학 >

우리나라에는 시장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있는 곳에 시장은 있다"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정부가
나서는데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

시장 원리란 자율과 책임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시장은 형성되는 것이다.

시장이 없다면 그것은 정부의 규제때문이다.

규제가 자율과 책임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시장이 없다고 개입할 것이 아니라 규제를 풀어 시장이 형성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장원리의 기본은 자율과 책임이기 때문에 정부가 해야할 일은
경제주체들이 더 많은 자율과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법과
제도의 미비로 자율을 상실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경제주체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에 시장원리가 작동되지 않는 것도 정부의 규제와
보호라고 하는 관치 금융때문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근 5개 은행의 퇴출에서도 폐쇄조치를 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P&A(자산
부채 이전)방식을 이용해 공개입찰과 같은 매각과정을 밟지 않고 강제 인수
시킴으로써 자율적 의사결정이라는 시장경제원칙을 위배했다.

이 과정에서 우량은행을 부실화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수은행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처리했다.

공개입찰에 부쳤다면 영업권을 포함해 더 좋은 값을 받을 수도 있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으며 국민부담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금 합병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합병도 정부가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이고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정부는 회생가능성 여부를 기준으로 퇴출돼야 할 은행이 있다면 매각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는 것까지만 하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구조
개혁 혁신 합병 등은 경쟁분위기를 조성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자율능력과 책임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인데 정부가 너무 깊이 개입하면 그러한 정신이 살아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금융산업의 근본적 개편이다.

한국 금융기관의 생산성이 외국의 50%밖에 되지않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구조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단기적 혼란이 두려워 원칙을 가지고 정면돌파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경쟁체제를 갖추기 어렵다.

매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부실채권을 매각하는 전문기구의 설립이
요구된다.

그리고 엄격한 운영기준을 정한다면 산업자본이 금융산업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할 때 남아 있는 우량은행과 신설되는 은행의 자율능력 및 책임
정신은 고양되고 경쟁력은 제고될 것이다.

이와함께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에는 예금자 보호에 제한을 두어 예금자도
책임을 지는 관행을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성사단계에 있다고 하는 빅딜도 시장원리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빅딜을 기업의 자율적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로는 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마지못해 하고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자율에 맡기면 그것은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빅딜을 해야 하는가.

빅딜을 통해서 한국기업들의 경쟁력이 제고될 수 있는가.

단지 과잉용량의 규모만 키우고 부실을 확대하는 것은 아닌가 할 뿐이다.

얼른 보기에는 한 기업으로 몰아주면 중복이 안돼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했던 방법이고 공산주의 국가는 그렇게 해
다 망했다.

정부주도의 빅딜은 일을 크게 그르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세 금융
측면에서 기업에 특혜지원이라도 하게 된다면 국민의 부담만 증가한다.

기업의 문제는 기업이 자기책임하에서 해결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정부는 해야할 일과 하지않아야 할 일을 좀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빅딜을 하라고 하는 것과 같이 경영에 개입할 것이 아니라 퇴출돼야 할
기업이 화의 법정관리 등으로 계속 남아 있지나 않은지를 주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보다 철저한 시장원리의 적용이 요구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