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면서 작은 조직, 글로벌화되어 있으면서 현지화된 조직,
중앙집권적이면서 분권화되어 있는 조직".

모순처럼 들리는 이 말은 GE, 지멘스와 더불어 세계 3대 중전기 업체로
손꼽히는 ABB의 퍼시 바네빅 전회장(현재 이사회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ABB는 세계 140여개국에 1천3백여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직원수도 21만명에 달한다.

매출 3백억달러의 거대기업을 중소기업처럼 유연하고 신속한 조직으로
만든 마술사가 바로 바네빅 회장이다.

그가 근대적 조직 모델을 구축한 GM의 알프레드 슬론에 이어 현대적
조직구축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BB는 지난 87년 스웨덴 아세아(ASEA)그룹과 스위스 브라운보베리가
합병, 탄생했다.

당시 바네빅 회장은 아세아의 사장으로 이 결합을 주도했다.

합병후 ABB의 사장으로 취임한 바네빅 회장은 우선 사업규모를 급속도로
확장시켰다.

발전설비, 철도차량등 국가차원에서 대규모로 추진되는 사업을 운영해야
하는 중전기 업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규모의 경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의 바탕에는 국가 단위의 프로젝트를 수주할때 자국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GE, 히타치등 경쟁사에 비해
시장개척에 소극적이고 영향력도 별로 없는 스위스나 스웨덴 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ABB의 절박한 상황도 있었다.

"ABB의 역사는 곧 M&A의 역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감한 기업사냥이
이루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88년에는 스웨덴의 환경관리업체와 덴마크의 철로정비업체, 89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송 배전사업등이 대표적인 M&A사례다.

90년부터는 동구와 아시아지역에서 잇달아 기업인수에 나섰다.

합작을 포함, 이지역에서 이뤄낸 M&A건수는 총 130여건.

덕분에 지난해 ABB는 총매출의 25%를 동구와 아시아지역 신흥 시장에서
올렸다.

이런 끊임없는 성장추구를 통해 바네빅 회장은 ABB를 세계 3대 중전기
업체로 키워냈다.

그러나 바네빅 회장의 경영전략은 덩치키우기에만 그친게 아니다.

거대해진 조직을 작은 조직처럼 유기적이며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해법은 조직의 분할이었다.

바네빅 회장은 사업부문과 지역부문을 양대 축으로하는 매트릭스 조직을
바탕으로 전 조직을 5천여개의 "이익센터(profit center)"로 분할했다.

이 이익센터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개개의 센터들이 독립회사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이 센터는 평균 50명의 인원으로 구성돼 있다.

덕분에 중소기업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상황과 고객의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장 환경에서의 조직 생존 조건으로 "스피드"를 가장 중요시
한 바네빅 회장은 작은조직을 더 빠르게 하기 위해 "T-50"운동을 도입했다.

전사적 업무 프로세스 시간 단축 운동이다.

"납기 지연으로 인한 손실은 실패에 의한 손실보다 크다"는 지론은
그의 경영철학을 잘 말해준다.

클레임에 대한 대응이 타기업의 경우 한달이 걸리지만 ABB는 일주일이면
가능하다.

그는 다국적 기업에 걸맞게 이사회도 국제화시켰다.

96년 일본 후지 제록스의 고바야시회장,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방장관을
비롯, 네델란드, 아일랜드, 독일, 스웨덴, 스위스 출신들로 이사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현지화에도 충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각 국의 독특한 문화와 관습을 중시, 현지 법인의 사장은 가급적 현지인이
맡도록 했다.

각 이익센터에 대한 대폭적인 권한 위임 또한 현지고객에 밀착된 경영을
가능하게 했다.

바네빅 회장은 비대해진 조직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료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ABB 합병당시 본사인원을 2천명에서 1백70명으로, 96년에는 또다시
70명으로 줄였다.

인수 합병한 기업에 대해서도 중간 관리층의 감축은 예외 없이 단행됐다.

미국 컨버스천 엔지니어링을 인수할때도 6백명의 본사 직원을 1백명으로
줄이는 작업이 먼저 진행했다.

ABB의 본사직원은 70명이다.

전세계 직원 21만명의 0.05%도 안되는 숫자다.

대개 10%내외의 본사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기업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율이다.

이런관리가 가능한 것은 업무 권한이 대폭 하부 조직에 위임했기
때문이다.

바네빅 회장 자신은 신흥 시장에 대한 진출등 최대 현안에 대한 지휘만을
맡고 나머지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임원진에게 일임했다.

또 해외의 모든 자회사 운영도 대부분 현지인 사장이 결정하고 본사는
대형 프로젝트의 추진과 자회사간 이견 조정만 수행한다.

각 이익센터는 독립채산제아래 영업 투자 활동은 물론 인력충원까지도
스스로 하고 자산관리, 대차대조표를 비롯한 재무제표를 독자적으로
작성한다.

이런 성공적인 분권화의 비결은 정보기술에 대한 바네빅 회장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는 과감한 투자를 통해 글로벌 네드워크 시스템을 구축했다.

ABB 합병이후 양사의 시스템통합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개월.

예상기간 5년을 훨씬 앞당긴 것이었다.

바네빅 회장이 정보시스템에 연간 7억달러를 투자하고 5천명의 인원을
투입한 덕분이었다.

ABB는 전세계 5천여개의 이익센터의 상황을 리얼타임으로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통제 보고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일례로 ABB 전사회계및 통신 시스템인 "ABACUS"는 각 이익센터의 연도별
계획 및 예산에 따른 월 분기별 진도 상황을 각 센터별, 사업영역별,
지역별로 분석하여 보여준다.

이렇게 철저한 통제및 모니터링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부 조직에 대한
분권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바네빅 회장은 지난해 스스로 최고경영자 자리를 후임에게 물려줬다.

후진양성을 위해서였다.

현재 그는 스웨덴 인베스터사의 사령탑으로 활약하면서 ABB 이사회
회장도 겸임하고 있다.

인베스터사는 1천억달러의 스웨덴 자본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투자회사로
스웨덴의 무선 통신기기 업체인 에릭슨, 제약회사인 아스트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바네빅 회장은 이런 인베스터사의 세계 진출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는것.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유럽기업 최고 경영자중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던 바네빅 회장이 또다른 신화를 만들어낼지 전세계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 조두연 AT커니 컨설턴트 seoul-opinion@atkearney.com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