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그룹에 속하는 T기업의 이 상무는 떨떠름하기만 하다.

회사가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 것이 맘에 걸린다.

구조조정대상이 될까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도 대규모 적자의 책임을 자기 재산으로 져야할 수도 있는 판국이
됐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이사회에서 이사들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영에 책임을 져야 할 등기임원은 전체 50명의 이사중 5명도 안된다.

그러나 등기임원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대주주가 아닌 다음에는 어차피 회장의 얼굴만 쳐다볼 수 밖에 없는 형편
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액주주들이 회사의 경영부실책임을 묻고 들어오면 회계담당임원
인 그 역시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지난달 24일 김성필씨 등 제일은행 소액주주 52명이 이철수 신광식 전
행장과 이세선 박용이 전 임원 등 4명에 대해 제기한 4백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은 국내 경영계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부실경영으로 회사가 입은 손해에 대해 경영진의 개인재산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이 판결은 그동안 대주주와 경영권이 오로지해온 회사운영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소액주주들을 대표했던 참여연대측은 당장 이달중 삼성전자
에 대해서도 삼성자동차에 대한 편법출자 등과 관련, 회계장부 열람권
청구와 이건희 삼성회장 등 경영진을 상대로 주주대표 소송을 내겠다고
선전포고를 해놓은 상태다.

참여연대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밝힌 5대그룹의 부당내부거래실태와 관련,
경영진의 부당행위로 회사와 주주들의 이익침해가 극심한 재벌기업을 상대로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경실련 등 각 시민단체들의 소액주주운동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소액주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소액주주들은 이제 외국인주주들과 마찬가지로 투명성을 높이고 대주주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축으로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경영인들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이곳저곳 눈치볼 데도 많은데 이제는 어느 소액주주들이 무엇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지 몰라 전전긍긍이다.

자칫하면 전재산으로도 책임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이사들의 눈치보기가 전보다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는다.

일본의 경우도 소액주주의 대표에 대한 소송이 폭주,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H기업 윤 상무는 "기업의 경영실적에는 각국의 경제사정 환율 등 경제적인
요인, 임금, 정치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이를 경영진의 책임
만으로 떠넘긴다는 것은 곤란하다"면서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업들은 요즘 경영진을 대상으로 임원배상책임보험에 들어두는 것이 유행
이다.

삼성 LG 등 상당수의 대기업들이 등재임원들을 대상으로 경영책임보험을
들어두고 있다.

LG관계자는 "계열사의 모든 등재임원들에 대해 보험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현대 쌍용 등도 임원배상에 대비하고 있는 등 이미 60~70개사가 보험에
들어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에서 보험을 들어준다면 임원들도 어느정도 마음의 짐을 덜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했다고 면책이 되는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경영상 판단미스에 대한 책임에도 대비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편 대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액주주들의 동향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요즘 한국의 초라한 경영인들이다.

< 채자영 기자 jychai@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