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범도 < 중기청 중기정책국장 >

작년에 지방중소기업청장으로 일할 때다.

중소기업 행정은 현장중심이어야한다고 믿고, 매일 한업체씩 방문하는 1인
1일 1사운동을 시작했다.

한 중소기업을 방문하니 사장이 대기업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매일 불려다니는데다 원가계산도 대기업이 직접 해서 기술개발의 효과도
누리지 못한다는 불만이었다.

하청업체로서의 서러움을 얘기했다.

다음날 그 대기업을 찾아갔다.

대기업측은 다른 말을 했다.

"몇년전 구멍가게 였던 중소기업을 키웠다.

중소기업이 수출시장 개척에 힘쓸 필요가 있나, 판로확대를 위한 광고비가
필요한가.

우리가 치열한 수주전으로 물량을 확보하면 중소기업은 땅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이 사례는 우리나라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성장초기 단계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추가부담을 한게 사실이다.

따라서 양자간 관계는 지배와 종속 내지는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개방되고 WTO(세계무역기구)출범 등으로 국경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상황은 변하고 있다.

대기업의 경쟁력이 거래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의 경쟁력에 좌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보완과 협력관계로 인식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위해 한계사업을 중소기업에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직접 생산하는 부분중 상당비중을 외주(아웃소싱)로 돌리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이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필요성에도 불구, 우리나라 대.중소기업간 협력은 양적으로는
어느정도 이뤄졌으나 질적인 부분은 다소 미진하다고 생각한다.

중소기업의 하도급 판매비중은 지난 80년 25.6%에서 지난 95년 78.5%로
3배가량 증가했다.

그러나 쌍방간에 동반자적 협력관계가 성숙돼있지 못한게 현실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부담을 넘기려는 경향이 남아있고 중소기업도 현상
유지에만 안주, 기술개발이나 품질향상에 소홀해온게 사실이다.

대.중소기업의 인식전환이 이뤄져야 바람직한 협력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

정부 정책은 자발적인 협력체제를 다지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음제도 개선과 불공정 거래관행에 강력히 대처하는 것 등을 통해 종속적
하도급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바꾸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몫이다.

당사자들의 인식전환과 정부의 이같은 노력이 결합될 때 앞서 예를 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시각차를 좁힐 수 있다.

그래야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역할에 감사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숨은
노력을 평가할 수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