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제로서 군주제를 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에서도 독점을
바라지 않는다"

지난 1890년 오하이오주 출신의 미 연방 상원의원 존 셔먼이 남긴 말이다.

그의 신념을 담아 제정된 미국 독점금지법(일명 셔먼법)은 이후 1백여년
동안 적지 않은 미국기업간의 합병 프로젝트를 무산시켰다.

대기업간 합병이 시장 독과점으로 이어져 소비자들의 권익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요즘 이 법은 사문화돼 가고 있다.

"경제적 국익을 위해" 미국기업들의 덩치를 키우는 일이 급선무라는데
정부와 산업계간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어서다.

"대형화"를 키워드로 하는 기업간 "메가머저"가 미국 산업구조조정의 마무리
수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잉-맥도널더글러스(항공), 시티코프-트래블러스(금융), 컴팩-디지털
이퀴프먼츠(컴퓨터), SBC-아메리테크(정보통신).

지난 1년동안 빌어진 대형합병 사례들이다.

이들 합병은 미국은 물론 세계산업 판도를 뒤바꾸고 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쳐 다운사이징으로 군살을 뺀 미국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겨냥한 "덩치 불리기"를 구조조정의 최종 종착역으로 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들 대형 M&A에 의해 미국의 주요산업은 소수의 "대표선수"들이 이끄는
판도로 바뀌고 있다.

경쟁력을 갖춘 몇몇 거대기업이 "메이저 리그"를 형성하고, 여기에서
탈락한 일부 기업들이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명맥을 잇는 양상으로 미국
산업계의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금세기 초에 붐을 이뤘던 "1차 M&A기"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당시와 요즘의 차이가 있다면 M&A의 지향점이다.

금세기 초의 M&A가 미국내 시장을 겨냥한 산업 구조 조정이었던데 비해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합병 붐은 "세계 제패"가 키워드다.

월가 증권회사인 베어 스턴즈의 앤서니 매그로 M&A 중개실장은 최근 일고
있는 대형 합병 시리즈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들이 주창한 글로벌화는 총론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적 규모의 경제"를 염두에 둔 최근의 M&A를 통해 비로소 글로벌화의
각론에 착수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숱한 기업들이 속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금융계의 연속적인 M&A에 의한 "간판 바꿔 달기"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90년대 초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은행을 합병했던 케미컬은행은
지난 96년 체이스 맨해튼 은행을 다시 집어 삼키면서 이름을 "체이스"로
바꿨다.

올 초 월가의 유서 깊은 유태계 증권회사인 샐러먼 브러더스를 샐러먼
스미스 바니라는 이름으로 합병한 트래블러스 그룹은 조만간 시티은행과
결합해 "시티그룹"으로 재출범키로 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간판 기업들에게 바뀌는 것은 결코 이름 만이 아니다.

"지구적" 관점에서의 조직과 전략을 갖춘 글로벌 초거대 기업으로 면모를
일신해 나가고 있다.

예컨대 "시티그룹"은 자산 규모 6천9백80억달러로 일본의 도쿄미쓰비시은행
(자산 6천9백10억달러)을 단숨에 제치고 세계 은행계의 외형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처럼 미국 기업들이 "초대형화"로 무장하고 있는 데는 정부의 "외조"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독-과점 소지가 있다"며 비틀었을 거대 기업간 결합을 철저히
묵인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경우다.

감독 당국인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의 로버트 피토프스키 위원장은 최근
미 언론들과 가진 일련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분명히 했다.

"(독-과점 여부의 판단 기준은) 세계 시장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미국 국내 시장 만을 고려 대상으로 해서 합병에 퇴짜를 놓는건
시대착오다"라는 설명이다.

그의 말을 뒤집어 말하면 합병 용인 대상은 "해외 지향형"일 뿐 "내수용"은
여전히 규제 대상이라는 얘기와도 통한다.

그 과정에서 "유탄"을 맞는 측도 한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사람"들이다.

대형 M&A를 단행한 회사들이 가장 먼저 단행하는 후속 조치중의 하나가
중복되는 조직및 인력의 "정리"이기 때문이다.

보잉은 지난해 맥도널 더글러스와의 합병 직후 1만8천2백명을 해고한데
이어 올 연말까지 8천2백여명을 추가 감축키로 했다.

그러나 철저한 시장 경제 원리에 의한 "경쟁력"을 지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미국에 이는 감수해야 할 사회적 비용일 뿐이다.

"군살 빼기"에서 시작해 "덩치 불리기"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는 미국의
구조조정은 석유화학 반도체 자동차 정보통신 등 상당수 업종에서 "중복
과잉 투자" 논란속에 있는 한국 산업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월가 관계자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지난 십수년 아시아 국가들이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동안 미국 경제와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 조정으로 칼을 갈아 왔다.

지금 아시아는 거품이 꺼지면서 공략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미국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모든 곳이 다 먹기 좋은 굴밭(oyster)이다.

조금이라도 더 덩치를 키워 사냥감들을 맘껏 먹어치우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세계 10대 M&A ]]

( 단위 : 10억달러 )

<>트래블러스+시티코프 - 업종 : 금융
합병규모 : 72.6
<>SBC+아메리테크 - 업종 : 통신
합병규모 : 61.0
<>뱅크아메리카+네이션스뱅크 - 업종 : 금융
합병규모 : 60.0
<>MCI+월드콤 - 업종 : 통신
합병규모 : 43.4
<>크라이슬러+다임러벤츠 - 업종 : 자동차
합병규모 : 35.0
<>도쿄은행+미쓰미시은행 - 업종 : 금융
합병규모 : 33.8
<>나이넥스+벨아틀란틱 - 업종 : 통신
합병규모 : 30.8
<>시바가이기+산도즈 - 업종 : 제약
합병규모 : 30.0
<>RJR나비스코+KKR - 업종 : 담배.식품
합병규모 : 29.5
<>뱅크원+퍼스트 시카고 - 업종 : 은행
합병규모 : 29.5

* 자료 : 시큐어리티스 데이터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