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균 < 경제부장 ygp@ >

요즘 정부는 중요정책을 발표할 때 별도의 영문 보도자료를 낸다고 한다.

외신기자를 위한 것이다.

지난 18일 55개 퇴출기업명단을 발표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자회견장에 외신기자들이 많았던 터이고 보면 세심한 배려인 셈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외신기자들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재정경제부는 지난 4월 아예 대외홍보부를 설치했다.

지난해 외환위기가 시작되기 직전 외신보도에 흥분했던 재정경제원과
비교하면 이는 큰 변화다.

당시 미국 불룸버그통신은 한국이 곧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정정보도를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은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말았다.

물론 정정보도가 나왔다는 얘기도 없었다.

외신에서 한국관련기사는 외환위기전에 비해 엄청나게 많아졌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외국언론의 관심은 대단하다.

얼마전 한국을 찾은 외국 경제전문지의 편집책임자는 한국이 기사거리를
많이 제공해줘서 고맙다고 조크할 정도다.

외국언론들이 특히 관심을 두는 건 책임있는 당국자들의 공언이다.

작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전의 일이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앞으론 은행도 망할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말은 정확한 예측이었다.

이르면 이번주 중에 문을 닫는 은행이 나올지도 모른다.

1년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국민들에게 말해준다는 점에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말이 그대로 외신을 통해 외국투자가들에게 전달됐을땐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외국 신용평가기관들은 한국 금융기관의 신용도를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금융기관들은 해외에서 기채를 하기 어려워졌다.

정책책임자들의 말 한마디가 뜻하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외신이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대외이미지는 달라진다.

국가신용도마저 오르락 내리락 한다.

외신의 오보를 막는다는 점에서 영문 보도자료는 중요하다.

그러나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치고 다른 나라 기자를 위한 발표자료를
따로 만든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영어로 하면 외신기자용이고 한국말로 하면 국내기자용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특히 말 한마디로 경제가 흔들거릴수도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의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기자회견을 할때의 일은 시사하는 바 크다.

어느 외국기자가 질문하자 김대통령은 갑자기 큰소리로 유재건 비서실장을
불렀다.

중요한 문제이니 정확한 통역을 부탁한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의 신중한 행동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출기업발표가 있었던 다음날인 지난 19일의 김대통령 발언은
금융시장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기업구조조정은 55개 퇴출기업을 선정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가 2차로 퇴출기업을 발표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부거래를 철저히 파악해 문제가 있는 기업이 퇴출되게
하라고 방법까지 알려주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바람에 금융기관 창구는 다시 얼어붙었다.

이번에 퇴출명단에서 빠져 안도하고 있던 기업들은 또다시 곤란을 겪고
있다.

추가로 퇴출이 있다는데 대출해줄 은행이 어디 있겠는가.

급기야 정부는 대출을 독려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심사도 하지말고 대출해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금융기관도 있다.

당선자 시절 신중했던 김 대통령으로선 뜻밖일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이 된후 자신감을 얻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기업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 책임자의 발언은 언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알수없다.

영문 보도자료를 따로 만들지 않더라도 그렇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