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암스덴 < 미국 MIT대 교수 >

한국 대기업들이 진행하고 있는 구조조정 작업은 고통스런 과정임에
틀림없다.

한국 경제와 기업들이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게 된 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차입이다.

특히 대기업들은 90년대 들어 전자 반도체 화학 제약 등 첨단 신규사업에
진출하면서 앞다투어 대규모로 외자를 차입했다.

이같은 차입이 누적된 결과 한국은 총체적인 외채위기에 빠져든 것이다.

한국기업들이 이런 위기를 탈출하려면 한마디로 외형성장주의를 포기하고
"질의 경영"으로 전한하는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기업들이 풀어야 할 과제의 하나인 "투명성 확보"도 이같은 궤도
수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외형(quantity)이 아닌 질(quality)에 전략의 중심을 둔다면 재무구조나
회계장부의 취약성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실기업 퇴출과 대기업그룹간 사업교환(빅딜)은 구조조정의
바람직한 첫 단추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평가할 때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과보다는 공이 훨씬
많은 경제주체라는 사실을 인정받아야 한다.

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이룩해 온 고도성장 과정에서 한국의 대기업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규모(size), 다각화(scope), 시장점유율(share) 등 이른바 "3S" 전략은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기업들은 이를 통해 글로벌화와 기간산업 투자확대, 중앙집권적인 연구
개발과 유능한 경영관리자 양성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해 냈다.

이들 성과물은 외환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도 훌륭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한국의 대기업들이 그동안 연구개발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해
왔다는 점이다.

대기업들이 추구해 온 규모의 경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도 특정 시점까지는
올바른 전략임을 부인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과정에서 대기업에 의해 경제력이 집중되는 시기를
거쳤다.

이들 "규모의 힘"이 기술력과 결합되면서 훗날 강력한 경쟁력을 키워 냈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대만은 중소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례로 전체 수출에서 중소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40%, 대만이
60%다.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다.

더욱이 대만 역시 갈수록 대기업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대만의 국내총생산(GDP)에서 1백대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70년에만
해도 25%에 불과했으나 90년에는 39%로 높아졌다.

대만도 "규모의 경제"에 이끌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내몰린 반면 대만은 화를 면한 이유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외환 자유화 등의 압력을 강력하게 받은 반면 대만은
비교적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한 예로 대만의 금융기관 자산 가운데 80%는 아직도 정부의 통제아래 놓여
있다.

바꿔말해 한국은 미국의 지나친 간섭과 부당한 압력으로 희생당한 셈이다.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결코 위기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한국에 있어서 외국인투자 유치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통스럽더라도 세수를 늘리고,채권발행 등으로 자금을 최대한 자체
조달해서 구조조정 재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기업들이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맞춰 양적성장 일변도의 전략에서 질적
고도화에 눈을 돌리고, 내적 저력을 결집해 구조조정을 추진해 나간다면
한국경제는 머지 않은 장래에 다시 화려하게 재기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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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지난 17일 코리아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가 뉴욕 맨해튼
의 유니버시티클럽에서 개최한 "위기를 촉매로, 한국 기업문화의 가속적인
변화"라는 심포지엄에서 앨리스 암스덴 MIT교수가 한 주제발표를 요약한
것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