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겁니까"

18일 퇴출기업 명단에 오른 용산 한일합섬 사무실.

10년 넘게 이회사에서 근무해온 이성주(40)씨는 TV발표를 보는 순간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앞이 캄캄해 지면서 눈이 침침해져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새벽부터 출근하느라 미처 떼지 못한 눈꼽을 없앴다.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후비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TV앞에 바짝 다가섰다.

아나운서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방송내용을 다시 들었다.

두번, 세번, 네번, 같은 내용이 말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옆에 있던 동료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역시 얼이 빠진듯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도록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함치고, 의자를 집어던지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이제 눈에 띄지 않았다.

삶의 터전인 직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소 성실하고 의욕적이던 김대리는 말없이 눈말만 흘리고 있었다.

"이제 실직자의 대열이 끼게 되는 건가" 순간 집에 있을 아내와 학교간
아들녀석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식구들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이 아파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한창 일할 나인데..." "어떻게 먹고 사나".

떨어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얼마전 TV에서 봤던 서울역앞 노숙자의 초라한 몰골도 떠올랐다.

남의 일로만 여겼는데 왜 자꾸 실직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L씨는
까달없이 화가 미칠었다.

이제 동료들도 하나둘씩 뿔뿔히 흩어져 몇명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면서 팔을 잡아끄는 동료들의 손을 뿌리친지도
한참이 지났다.

점심시간이 지나 벌써 오후 근무시간이 됐지만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먹성좋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워낙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터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꺼낸 문 담배가 벌써 열개째.

오늘 따라 도무지 담배맛을 느낄수 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오랫동안 가전제품 부품을 생산해왔기 때문에 퇴출기업에 포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연일 언론에서 "살생부"니 "빅딜"이니 떠들었지만 관심도 두지 않던 그였다.

다른 회사는 몰라도 우리회사 만큼은 끄덕없을 줄 알았다.

"퇴출이라는게 뭡니까. 모두 직장에서 떠나라는 말입니까"

"그룹 주력회사인데다 매달 흑자를 내는 우량기업을 도태시키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 짐을 꾸려야 할지, 남아있는 일을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몸바쳐 열심히 일했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이씨는 혼란과 허탈감이 극에 달해 서서히 분노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 이건호 기자 lee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