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성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산업정책연구원 원장) >

한국은 앞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후진국으로 추락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으로 6월말까지 두 주일 동안에 알게 될 것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보도기사를 접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6월말에 예정된 부실은행의 경영평가 결과 발표로서, 이로부터
시중은행간의 흡수합병(빅 뱅: Big Bang)에 대한 윤곽이 나올 것이다.

둘째는 6월20일에 은행들이 발표할 퇴출 대상 기업명단.

이는 30대 재벌그룹에 대한 정부 정책은 물론, 5대 재벌그룹간의 대규모
업종 맞교환(빅 딜:Big Deal)에 대해 시사점을 줄 것이다.

셋째는 민노총이 참여하기로 결정한 제2기 노사정 위원회에서 이루어질
합의내용이다.

이는 한국경제가 거쳐야 할 구조조정에서도 가장 사회적 파장이 큰 실업
문제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조율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빅 튠(Big Tune:
큰 조율)이라고 표현해도 될 듯 하다.

은행, 기업, 그리고 근로자들이 겪어야 할 변화는 우리가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도약의 길을 추구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들은 가히 한국경제라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시멘트, 자갈, 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선결과제가 빠져 있다.

철근이 없이는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듯이 정부 자신의 개혁 없이 한국
경제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가능성은 전연 없다.

이러한 정부 개혁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소명의식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빅 콜(Big Call: 큰 소명의식)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제 그 이유를 논의해 보자.

한국경제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일의 기회를 모색하기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비전에는 크게 세 가지 대안이 있다.

첫째는 재벌들이 선호하는 수출촉진 정책으로서 김우중 차기 전경련회장이
주장하는대로 수출증대로 연간 무역흑자 500억달러를 달성해 단기간에
외채를 갚자는 것이다.

둘째는 주로 정부관료들이 선호하는 경쟁력강화 정책으로서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석유화학 산업 등 이미 한국기업들이 큰 규모로
투자해 놓은 자본집약적 산업이 안고 있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재벌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바꾸어 경쟁력을 회복하자는 KDI 등
관변 연구기관의 주장이다.

셋째는 학계및 언론계에서 선호하는 정보산업화 정책으로, 지식.정보집약
산업이 중심이 되는 21세기에 대비하여 제조업에서 유통, 금융, 정보통신 등
서비스 부문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세가지 대안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수출촉진 정책은 현재 우리가 처한 외환위기를 감안할 때 단기적으로
가장 필요한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선진국으로의 진입과정에 있어 더 이상 선진국으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상이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수출 품목에서 우리는 중국, 말레이시아 등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입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제 한국 국민의 생활 방식은 70년대 수출 지상주의 속에서 국가
발전을 위하여 개인적인 욕구를 희생하던 시절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두번째 경쟁력강화 정책은 이미 우리가 투자해 놓은 사업에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달성할 만한 대안이다.

그러나 고비용 저효율 문제가 책상 위에서 계획하는 대로 단기간에 제거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투자해놓은 산업은 대부분 일본을 위시하여 전세계적으로
과잉투자가 일어나 가격경쟁으로 인한 경기위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번째 대안은 논리적으로 가장 정답에 가깝다.

그러나 정보집약적 산업은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과 이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지도자, 이러한
산업의 추진주체인 기업, 그리고 이 분야에서 부가가치를 올리는 핵심
역할을 하는 국민들이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가 과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 가지 대안 모두 실행에 옮기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단기적으로는 첫번째 대안을 추진하고, 중기적으로는 두번째 대안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세번째 대안을 도모하자는 식의 주장이다.

그러나 전략이란 그렇게 수립되고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전략이란 여러가지 상충하는 대안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아깝더라도 다른 대안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을 예로 들어보자.

정부가 1안을 채택하여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종합상사를 다시 가동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소위 문어발 식으로 여러 산업에 다각화되어 있는
현 재벌체제를 유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반면에 2안대로 경쟁력강화를 위해서는 재벌그룹 별로 구조조정을 통한
업종 전문화가 필수적이다.

3안의 핵심산업은 재벌기업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재벌 정책
자체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해진다.

재벌을 동시에 키우고, 구조조정하고, 없앨 수는 없듯이, 위의 세 가지
대안은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세가지 대안중 최악의 선택은 충돌과 우왕좌왕이다.

한 부서에서는 1안, 다른 부서에서는 2안 하는 식으로 상충하는 견해가
나오거나, 같은 부서에서 오늘은 2안, 내일은 3안 식으로 주장하면 재벌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정부 부처 중 하나인 재경부가 요구하는 2안에 따라 섣불리 구조
조정을 했다가 나중에 정부 입장이 1안으로 정리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재벌들은 구조조정을 하라고 아무리 정부가 독려해도 진심과 의지가
결여된 보고서만 제출하면서 시늉만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 6개월 간 우리는 주요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에 관한 한 시간을
낭비했다.

세가지 대안중 차선책은 어느 것이든 관계없이 하나를 빨리 선택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세가지 대안은 이미 언급한대로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어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추진하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세가지 대안중 최선안은 무엇인가?

정답은 국민 경제를 구성하는 각 경제주체가 제각기 하나씩의 대안만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올바른 수순이 있으니, 변화의 첫번째 단추는 정부가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먼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정부관리가 하는 말을 믿는 기업과 국민은 아무도 없다.

정부가 자율화를 아무리 강조해도 국민들은 공무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을 요구해도 기업은 1년 안에 정부 정책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한다.

역대 대통령중 노태우 대통령만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등 취임초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재벌비판을 하지 않은 대통령이
없었고, 그 후 친재벌 정책으로 돌아서지 않은 대통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기혁신을 통한 구조조정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은 그 이후의
모든 구조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만일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자신의 기득권, 즉 국가 행정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과 행정 명령에 입각한 공무원 개인의 자의적인 재량권을 유지한 채
은행과 기업의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근로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들은
모든 방법을 통해서 정치인과 공무원이 가진 영향력과 재량권에 의존하여
자신의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쓰지 않는 사람은 디오게네스의 등불로서도 찾을 수
없듯이 대부분의 정치인과 공무원이 자신이 가진 영향력과 재량권을 발휘
하여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에 간섭함으로써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할
것이다.

그에 따라 정경유착, 관치금융은 계속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만이
희생되는 것을 잘 아는 근로자들은 길거리로 나서는 방법 외에 자신을
보호할 길이 없게 된다.

이러한 수순이 현실로 나타날 때 한국이 후진국으로 추락하는 것은
명약관화의 사실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진정으로 한국을 선진국으로 도약시키기를 원한다면 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구조조정보다 한층 강도가 높은 개혁, 즉 한국판
페레스트로이카를 정치인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진행하여 국민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되면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
기관의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한다.

반면, 기업의 구조조정은 은행의 몫으로 맡겨야 한다.

이 일을 끝낸 후 정부는 세번째 대안, 즉 정보산업화정책을 주도함으로써
21세기 한국의 국가 경쟁력을 위한 기반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정부 다음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경제주체는 은행이다.

현재 경제위기의 원인중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산업에서는 정부주도의
구조조정을 통해 먼저 부실 은행부터 퇴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존하는 은행들은 다른 은행과의 흡수, 합병을 통해, 그리고
재벌기업에 대한 여신 등의 업무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통해 스스로의
경쟁력 강화에 주력해야한다.

경쟁력을 갖춘 은행들은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을 주도하여 퇴출기업을
정리하고 생존기업에 대한 적절한 금융지원을 해야 한다.

즉 앞서 든 두번째 대안인 경쟁력강화를 위한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은
은행이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은행주도의 구조조정으로 부실기업이 정리된 후, 여기에서 생존하는
기업들은 전문화를 통한 경쟁력강화에 노력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첫번째 대안, 즉 수출촉진 정책을 통해 경쟁력이 있는 제품으로
세계시장으로의 수출을 주도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현안인 외채
상환에 주력해야 한다.

실업문제는 정부, 은행,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국민경제의 활성화를 막고, 경제흐름을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영향을 행사
하던 정치인과 공무원, 문을 닫은 금융기관이나 파산한 기업의 임직원,
그리고 직장을 잃은 근로자들은 이러한 일신상의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사회에서 나타나는 정보집약적 산업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앞으로 정부가 세번째의 대안인 정보산업화 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창업, 벤처, 소호(SOHO: small office, home office)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한국인은 배움에 관한 한 족탈불급의 경지에 있다.

외국인이 2~6개월 걸려야 습득하는 컴퓨터를 한국인은 1주일 2달이면
습득한다고 한다.

정보화 사회는 이미 문밖에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빨리 문을 열고 새로운 사회를 받아들여 21세기(2000~2099년), 제3순세기
(2000~2999년)에는 한국을 세계최고의 선진국으로 만들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