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통해 부실기업정리를 원격조정해오던 정부가 5대 재벌을 향해
직접적인 화살을 쏘았다.

자율에 맡긴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사실상 강제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5대
그룹만은 "자율"에 맡기기로 했었다.

외자유치나 부실기업퇴출등을 스스로 해낼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달말 끝난 은행들의 기업부실판정결과 5대그룹소속 계열사는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요란하게 시작했던 기업구조조정이 실속없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있다는 비판이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국내외에서 거세게 제기
될 것으로 예상됐다.

구조조정을 통한 외자유치와 이를 바탕으로한 국제신인도제고라는 새정부
기대가 "5대 재벌과 은행의 소극적인 자세"로 물거품에 그칠 소지가
커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마련을 위해 국민을 설득해야 하고 정리해고
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노동자도 달래면서 2기 노사정위원회를 성공적으로
끌고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5대재벌의 미지근한 구조조정은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이날 5대 재벌에 "부실기업을 알아서
정리하고 못할 경우 주채권은행이 여신을 회수해 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다.

협조융자를 받고 있는 대기업에 대해 조속한 시일안에 퇴출여부를 결정
하라고 은행들에 지시한 것도 5대재벌 부실기업정리요구와 같은 맥락이다.

알량한 부실기업 몇개를 정리하는 것으로 기업구조조정을 끝내서는 안된다
는 경고가 담겨 있다.

금감위의 이같은 방침변경은 청와대가 "기업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고
질책한후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 위원장은 3일 오전 김대중대통령에게 기업구조조정 진행과정을 보고
했다.

이 위원장은 그러나 "5대그룹 부실기업정리 필요성은 대통령보고전에 이미
거론됐다"며 청와대 질책을 부인했다.

이 위원장은 "자율에 맡겨 이뤄지지 않는다고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고 말했다.

그는 "5대그룹은 핵심역량사업에 주력하라는 기본방침이 서 있었다"며
"부실기업정리는 그 방침과 맥을 같이 한다"고 설명했다.

이제 관심은 금감위가 5대 재벌중 어느 재벌을 겨냥하고 있는지, 협조융자
를 받고 있는 11개 대기업중 어느 곳에 화살을 쏘려는지에 모아지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설만 분분하다.

금감위 관계자는 "사업전망이 그리밝지 않은데도 지금 괜찮다고 끌고가다가
결국 그룹전체에 부담을 줄 계열사는 고통스럽더라도 잘라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5대그룹은 나름대로 외자유치와 부동산매각 등으로 구조조정을 진행
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가 직접적인 표현으로 기업정리를 촉구함에 따라 자율에
의한 기업정리는 퇴색되고 말았다.

주채권은행과 협의하면서 진행중인 자산매각 외국자본유치 등이 이번 조치로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구조조정의 원칙을 제시하고 일관성있게 기업개혁을
추진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고광철 기자 gw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