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의 상징이자 구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 명동성당이
오늘 축성 1백주년을 맞았다.

이 성당이 있는 명동 일대는 옛날 명례방이라 불린 곳으로 우리나라
천주교회창설과 인연이 깊다.

베이징에서 영세받고 정식 교인이 돼 1784년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과 함께 명례방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
모여 자주 종교집회를 갖는다.

85년 봄 신앙집회가 발각돼 모두 형조에 끌려간다.

다른 교인들은 훈방됐으나 김범우는 천주교 신봉여부를 다짐하는 심문에
"서학은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고 이듬해 병으로 죽어 조선천주교 첫 순교자가
된다.

한미수호조약(1882)이후 종교의 자유가 어느정도 허용되자, 교구장 주교
블랑(M J G Blanc)이 명례방에 성당을 짓기로 하고 부지로 판서를 지낸
윤정현(1793~1874)의 제택을 구입한다.

1892년5월8일 정초식을 갖고 건축을 시작했으나 청일전쟁과 설계를 맡았던
프랑스 고스트신부의 별세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98년5월29일 완공, 축성식을
거행했다.

길이 69m, 폭 28m, 지붕높이 23m, 종탑높이 45m에 지붕을 동판으로 이은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화조 건물이다.

건축당시 장안에는 양옥집을 지을수 있는 기술자가 없어 목수 미쟁이
벽돌공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 썼다.

종탑이 높아 이 성당은 "뾰족집"이라 불렸고 각지서 구경꾼이 찾았다.

순교의 터에 세워진 이 성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매국노 이완용은 1909년 이곳에서 칼침을 맞는다.

일제말기 조선총독부는 성당의 종을 공출로 걷어가려 했으나 완강히 거절,
해방때까지 종을 치지못한 과거가 있다.

70년대 유신독재시절, 80년대 민주화운동때 이곳은 늘 억압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됐다.

IMF구제금융이후엔 노숙자가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일자리를 잃은 "경제적 소외자"의 쉼터로 바뀐 것이다.

늘 시대의 아픔과 같이 해온 명동성당이 지금 경제고통을 함께한다는
시그널 같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를 기원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