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회사인간 ]]

입사 10년차인 박모과장(38.D시스템).

그는 지난 2월 이사로부터 팀원중 2명의 사표를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인사고과 자료도 넘겨받았다.

박씨는 먼저 맞벌이를 하고 있는 입사 3년차인 이모(27.여)씨를 불러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표는 우편으로 왔다.

나머지 한 명은 저절로 해결됐다.

입사 2년차 차모씨(29)가 질식할 것 같은 회사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 것이다.

박과장은 이렇게 "할당량"을 채웠다.

그러나 악역이 끝난게 아니다.

회사가 추가 구조조정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는 8월까지 2명을 더 추려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

팀 분위기는 냉랭하다 못해 비장하기조차하다.

앞으로 2개월동안 치열한 "살아남기 전쟁"을 치러야한다.

최근 연공서열제가 깨지고 연봉제 도입이 활발하다.

경륜을 중시하는 유교적 질서 대신에 젊음이 "살생"의 잣대가 되는 풍토가
번지고 있다.

이 한가운데 정리해고가 자리잡고 있다.

이와중에서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노력은 처절하다.

업무량이 눈덩이처럼 늘었다.

해고된 사람의 몫이다.

야근으로도 처리하지 못하면 휴일을 반납한다.

물론 특근수당이나 야근수당 신청은 꿈도 꾸지 못한다.

유노동 무임금이다.

"근무시간에 맡은 일을 끝내도 맘대로 퇴근할 수 없다.

애사심이 강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H기업 김모과장)

몸값을 올리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실적과 성과만이 유일한 자신의 "방패"다.

같은 부, 팀내의 선배와 동기, 후배 모두가 경쟁자다.

연봉제, 성과급제의 산물이다.

입사후배가 언제 나의 상사가 될 지 모른다.

자신의 경쟁력을 키우지 못하면 "내일"은 없다.

프로직장인 또는 탈샐러리맨을 위해 경제와 어학공부는 기본이다.

근속연수가 늘어도 감봉까지 당할 수 있도록 한 연봉제는 가뜩이나 움추러든
샐러리맨의 목을 죄고 있다.

그렇다고 불협화음을 내지도 못한다.

능력평가가 개인및 조직단위로 이뤄지고 있어서다.

다른 부서의 업무협조가 들어오면 성심성의껏 처리한다.

회사내 좋은 평판을 의식해서다.

그래야만 장수할 수 있다.

근무중에 숙취를 풀기위한 사우나행은 찾아볼 수 없다.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가 정보독점현상이다.

업무에 관한 노하우, 거래선에 대한 정보를 혼자만 챙기려한다.

신입사원들에게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회식자리도 줄었다.

동료들끼리 2차, 3차를 가는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얇아진 지갑, 접대비 삭감도 한 원인이다.

"사회초년병에게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치던 다정한 선배의 모습은 사라졌다.

신입사원의 재기발랄한 모습도 옛날 얘기다" (LG화재 이모대리)

이러다보니 대화도 많지않다.

회의때마다 입조심하려고 애쓴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찍히는 것"보다는 침묵이 낫다고 여긴다.

무조건 상사의 말을 따르는 "예스맨"도 증가하고 있다.

자연 조직원내에 비밀이 많아졌다.

"웬만한 지시는 군소리없이 행한다.

문제점을 알아도 되묻지 않는다.

이에 따른 비효율도 심각하다" (삼익악기 모부장)

< 이심기 기자 sg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