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석 < 삼성경제연구소장 >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았지만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에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주만 기습을 총지휘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미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지미파로 일본이 절대 미국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전력차이로 보아 개전이 되면 한 6개월 정도, 잘해야 1년쯤
버틸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기획원에서도 미국과 일본의 석유 철강 알루미늄 등 전략산업을
비교분석한 끝에 전쟁은 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확전으로 치달아온 국책기조를 바꿀 수가 없었고 대외체면 국내여론 등에
떠밀려 갈데까지 간 것이다.

이렇듯 이 세상의 크게 잘못된 일들은 처음부터 마음먹고 저질러진 것이
드물다.

모두들 "어떻게 되겠지"하고 서로 미루면서 어물어물하다가 벼랑으로 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일본에선 태평양 전쟁의 악몽을 상기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결단을 못내려 "어어"하는 사이에
대공황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다.

세상의 분위기를 바꿀만한 전기나 결단이 없으면 잔시비나 하면서 결국
함께 사지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가는 과정을 보더라도 비슷하다.

모두들 경제에 대한 걱정도 많이 하고 대책도 세운다고 세웠지만 결국
파국을 보고 말았다.

모두들 걱정만 했지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경제가 어렵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속담에 "손톱밑에 가시 든줄은 알아도 염통에 쉬 슨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크고 근본적인 문제보다 사소해도 당면한 문제가 앞선다는 뜻이다.

만약 작년에 동남아 통화위기가 없었다면 한국경제는 뇌관을 안은채
뒤뚱거리며 그대로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을들어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드니 경제 걱정보다 득표
계산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의 파고가 덮쳐오는데 "손톱밑 가시"같은 시비에 날을 지샜던
것이다.

선거 막바지에 여야가 벌인 시비중엔 한토막 코메디 같은 것이 너무 많다.

그래도 당시엔 성심성의를 다해 싸웠고 또 모두들 흥미롭게 관전했다.

불행하게도 국정지도자는 그런 사지에의 집단 행진을 알아볼만한 안목도
부족했고 그걸 막을 결의나 결단은 더욱 없었다.

결국 모두들 걱정이나 하면서 또 한편으론 열심히 잔시비나 벌이면서
IMF체제라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들쥐떼가 최면에 걸린듯 낭떠러지로 줄을 이어 몰려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작년말 국가 부도위기라는 큰 충격을 받고 집단최면 상태에선 일단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긴박했던 외환에 다소 숨통이 트이니 또다시 이상한 흐름이 보이고
있다.

염통보다 손톱밑 걱정이 앞서고 코메디같은 시비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무슨 회의도 자주 열리고 있고 감사원과 검찰은 지난일을 화급하게 열심히
감사, 수사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자는 논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외환부도는 겨우 넘겼지만 외채문제는 여전하고 구조조정을 서두르지
않으면 경제기반이 무너질 판인데 논의만 무성할뿐 일이 진전되지 않는다.

모두들 걱정만 할뿐 행동이 없는 것이다.

하필 지방선거가 겹쳐 염통 걱정을 할 겨를이 없다.

득표계산과 잔시비가 치열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으므로 바깥 사정만 괜찮다면 그런대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동남아 위기가 심상치 않다.

작년에 다소 애를 썼지만 충분치 못해 낭패를 겪었듯이 금년에도 그럴
위험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지금의 흐름과 분위기를 바꿀 전기를 만들고 일대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또다시 모두들 걱정을 하면서 낭떠러지로 떠밀려가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작년 환란도 마찬가지였지만 제2의 환란도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서로
미루다가 "어어"하는 사이에 맞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