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부실기업 정리방침이 재계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달말까지 작성되는 정리대상 기업 명단인 이른바 "살생부"가 부실기업
뿐만 아니라 멀쩡한 대기업과 중소기업들도 떨게하고 있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협조융자를 받았거나 부도 징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기업 임직원들은 실직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손을 놓고 있다.

특히 이들 기업과 거래해온 기업들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비상이 걸렸다.

일부 그룹들은 "정리"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정리하겠다며 과감한 사업조정
내용을 담은 구조조정계획을 작성해 내놓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난 11일 정부방침에 다소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던 일부
경제단체들은 정부의 의지가 강한데 놀라 한발 물러서고 있다.

실제로 주식시장은 이날 한때 11년만에 지수 3백50선이 붕괴되고 정리대상
으로 거론되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3백15개 종목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충격파는 "살생부"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다.

협조융자를 받았던 기업,부도가 한 번 났던 기업들이 그들이다.

협조융자를 받은 한 그룹의 직원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며 "출근해서도 일손을 놓고 동료들이나 다른 회사의 친구들을
상대로 새로운 소식을 묻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의 간부는 "직원들의 동요가 심하지만 무마할 방법이 없는
상태"라며 "정부나 금융기관의 원칙이 명확치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침몰하는 배에 탄 선원과 같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헤드헌팅업체 관계자들은 정부 방침이 알려진 이후 30대 그룹 임직원중
전직을 문의하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외국계 기업의 경력사원 채용 정보를 묻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귀띔이다.

거래 기업들의 불안감도 증폭되고 있다.

자칫 앉아서 돈을 떼이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서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한 그룹 관계자는 30대 그룹중 10여개 그룹이
퇴출된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이후 거래 기업들로부터 "괜찮으냐"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느냐"는 내용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부도설이 나도는 모그룹 협력업체 담당자는 "거래 기업에서 전화가
오면 기업 구조조정 계획과 수주 호조 등을 설명하면서 안심시키려 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해외 바이어로부터도 형편을 묻는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며 수출
까지 마비될지도 모른다고 몸을 떨었다.

일부 기업 관계자들은 어렵게나마 지속되던 자사 발행 어음의 할인이 거의
중단된 상태라면서 "불과 20일만에 기업의 생사를 과연 결정지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정리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정리하자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이날 쌍용그룹과 거평그룹이 각각 3~4개,4개로 계열사를 정리하겠다는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한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대부분 하위 그룹들도 앞다퉈 구조조정계획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경련은 14일 회장단회의에서 인위적인 부실기업 정리를 반대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알려진 이후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왜 구조조정에 반발하느냐"는 질책을 받았기 때문
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부실기업 정리에 대한 정부와 은행권의 혼선이 정리되고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발생할 실직자에 대한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이같은 불안감이 갈수록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