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정축재처리법안 (하) ]]

61년 3월4일에 경제5단체가 일간지에 발표한 성명서의 파문이 커지자
민의원은 3월 중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위는 16일 한국경제협의회와 방직협회 건설협회 대표 등 5명을 국회로
불렀다.

민의원 조사위원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국회의원들을 김일성 괴뢰의
동조자로 모독한 이유가 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경제계 대표들도 고분고분하진 않았다.

경제협의회 이한원 부회장은 "지금 이 법이 통과돼 중소상공인 5만여명을
피의자로 묶는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맞받아쳤다.

심상준 간사는 "5~8년전의 경제사범을 소급입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세계인권공동선언 제11조2항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김주인 사무국장도 "5만여명이 한꺼번에 처벌받으면 형량이 훨씬 줄어들
것을 알면서도 일벌백계로 우리 동료인 소수 대기업에만 한정할 것을 요구한
충정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부정축재자처리법은 자유경제체제에 나쁜 선례를 남겨 앞으로
두고두고 경제발전에 저해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파문을 일으킨 성명서를 의식해 "다급한 경제위기를 염려한
나머지 좀 지나친 표현을 해 민의원들에게 누를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표현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들의 설득은 주효했다.

조사위원들은 한참 듣더니 경제계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민의원 전체가 북한에 동조한 듯한 표현을 담은 성명서 내용을
바로잡아 경제5단체 명의로 신문에 해명서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또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위한 심포지엄을 갖자고 제안했다.

경제협의회로선 일단 한 고비 넘긴 셈이었다.

경제협의회는 이와 별도로 성명서파문을 수습하기 위한 여론조성 작업을
벌였다.

민의원과 참의원의 중진의원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서는 한편 장면
총리측과의 공식 회의도 추진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일부 학게 인사들은 한국경제협의회를 당시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처리법을
피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아직도 오해하고 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다.

사실이 이를 말한다.

3월20일 열린 경제협의회 이사회 기록을 보자.

김용완 경방사장의 발언이다.

"지난번 발표한 성명서에는 표현이 너무 직선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구절이
있었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경제협의회 창설문제가 나왔을 때 마침 세론에 오르내리는 소위
"부정축재자"를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문제에 매우 고심했습니다.

전택보 천우사사장과 나는 앞으로 여론이 격화될 것이 뻔하니 이들을 일단
창립회원에서 제외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재계의 대동단결을 위해 이 분들도 회원으로 가입시켰습니다.

지금은 어차피 문제가 불거진 상태입니다.

경제단체는 싸우는 것보다는 설득으로 자기편을 만드는 것이 운영
원칙입니다.

민의원과 더 이상 대결하지 말고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벌여야 합니다"

경제협의회는 3월24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장면 내각과 경제협의회 회장단
심야회의에서 정부측의 지원약속을 얻어낸다.

마침내 4월4일 참의원은 부정축재처리법안의 내용을 완전히 뜯어고쳐
민의원으로 돌려보냈다.

내용은 3.15부정선거와 관련한 부정축재자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피의대상자도 5만7천여명에서 기업체 72개사를 비롯 공무원 및 정당인
6백여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민의원 최종표결을 남겨두게 됐다.

협의회 회장단은 이 문제를 완벽히 매듭짓기 위해 민주당 구파 영수인
윤보선 대통령에게까지 찾아갔다.

현직 대통령인데다 명문가 출신으로 성품이 꼬장꼬장해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화신의 박흥식 사장이 해방전부터 친교가 있어 비교적 쉽게 풀렸다.

부정축재자처리법은 결국 4월10일 민의원을 통과했다.

재적 1백63석중 가 1백38표, 부 25표였다.

장 총리는 전각료를 대동하고 민의원에 참석해 재계를 지원했다.

경제협의회가 재계의 대동단결을 이끌어 시장경제주의를 지킨 것이라는
평가는 나만의 편견은 아닐 것이다.

2개월여에 걸친 노력 속에 경제협의회는 첫 시련을 첫 성과로 남길 수
있었다.

정부와의 공방 과정에서 경제협의회는 단결력과 행동력도 응집할 수
있었다.

그때 이 부정축재자처리법이 원안 그대로 통과됐더라면 어찌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마 "한강의 기적"은 훨씬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그나마 민주당 정권에서 이런 식으로 정리된 것도 큰 다행이었다.

부정축재자처리법안이 매듭지어지지 않고 5.16쿠데타 이후로 넘어갔다면
군사정부는 아마 더 많은 숫자를 피의자로 몰아붙였을지도 모른다.

혁명이나 쿠데타 뒤에는 항상 광풍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