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읽기] 오주석 저서 '단원 김홍도' .. 시/음악에 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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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는 가난한 풍속화가가 아니라 국왕 직속의 특급 화가였다.
그는 그림솜씨 못지않게 시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오주석(42)씨가 김홍도의 전기 "단원 김홍도"
(열화당)에서 새로 밝힌 내용들이다.
95년 김홍도 탄신 2백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공동 전시회를 주관했던 오씨는 이 책에서 50여가지의 새 자료를
공개했다.
그 중에는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용주사 대웅보전의 불화가 김홍도
작품이 아니라는 통설을 뒤집고 단원이 이명기 김득신과 합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최근 발견한 김홍도의 시조 2수와 즉석에서 지은 한시 연구도 소개돼 있다.
오씨는 김홍도의 사망시기가 1812~18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며 1806년이
옳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쓸쓸한 가을의 소리를 담은 1805년작 "추성부도"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주장이다.
단원은 한시 시조뿐만 아니라 거문고 퉁소 비파 젓대등 악기에도 능했던
음악가였으며 중인 신분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갖추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함께 어울렸던 인물들도 당대를 주름잡은 예술인 학자 고관들이었다.
그의 호 "단원"(박달나무가 있는 뜰)은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에서
그대로 따온 것.
단순히 그림솜씨만 뛰어난 "환쟁이"가 아니라 수준높은 문인이자 학자
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또 술과 매화와 친구를 좋아한 풍류남아로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다고
한다.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한국적 특성의 "김홍도 화풍"을 확립한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연풍 현감 시절 인근 상암사에 크게 시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경시대의 거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그도 정조가 죽은 이후 특별
대우가 사라져 어려운 노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 고두현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6일자 ).
그는 그림솜씨 못지않게 시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오주석(42)씨가 김홍도의 전기 "단원 김홍도"
(열화당)에서 새로 밝힌 내용들이다.
95년 김홍도 탄신 2백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공동 전시회를 주관했던 오씨는 이 책에서 50여가지의 새 자료를
공개했다.
그 중에는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용주사 대웅보전의 불화가 김홍도
작품이 아니라는 통설을 뒤집고 단원이 이명기 김득신과 합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최근 발견한 김홍도의 시조 2수와 즉석에서 지은 한시 연구도 소개돼 있다.
오씨는 김홍도의 사망시기가 1812~18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며 1806년이
옳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쓸쓸한 가을의 소리를 담은 1805년작 "추성부도"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주장이다.
단원은 한시 시조뿐만 아니라 거문고 퉁소 비파 젓대등 악기에도 능했던
음악가였으며 중인 신분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갖추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함께 어울렸던 인물들도 당대를 주름잡은 예술인 학자 고관들이었다.
그의 호 "단원"(박달나무가 있는 뜰)은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에서
그대로 따온 것.
단순히 그림솜씨만 뛰어난 "환쟁이"가 아니라 수준높은 문인이자 학자
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또 술과 매화와 친구를 좋아한 풍류남아로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다고
한다.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한국적 특성의 "김홍도 화풍"을 확립한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연풍 현감 시절 인근 상암사에 크게 시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경시대의 거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그도 정조가 죽은 이후 특별
대우가 사라져 어려운 노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 고두현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6일자 ).